Chapter 24: 왕의 선언

통신 장비의 스위치를 올리자 노이즈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기계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으나 무시하고 다이얼을 돌렸다. 지하 리더의 기억 속에서 훔쳐낸 주파수는 이미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숫자 하나하나를 맞출 때마다 지직거리는 소음이 정교해졌다. 마침내 일정한 파동이 잡히자 나는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지하의 쥐새끼들 보고 있나."

내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되돌아왔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통신에 당황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수 초가 지나고 나서야 상대방의 응답이 들려왔다. 아주 차갑고 기계적인 남자의 음성이었다.

"여기는 벙커 01 관제실이다. 수색대 이외의 개체가 이 주파수를 사용하는 것은 규정 위반이다. 발신자, 자신의 식별 번호를 대라."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식별 번호 같은 건 없다. 너희가 '마스터 샘플'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직접 말을 걸고 있으니까."

상대방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통신 너머에서 여러 명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곧이어 이전보다 조금 더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책임자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마스터 샘플이라고? 수색대는 어떻게 된 거지? 그들은 실험 개체 회수를 위해 파견되었다. 즉시 위치를 보고하고 투항해라. 그것이 인류 재건을 위한 너의 유일한 의무다."

"착각이 심하군. 너희 수색대는 이미 내 아이들의 먹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장비들은 이제 내 것이다."

나는 마이크를 고쳐 쥐고 창밖을 보았다. 운동장에는 기계와 생체가 결합된 하이브리드 원정군이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옥상의 모녀 코어에서는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와 내 의식과 공명했다.

"의무라니,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너희가 구석진 구멍에 숨어 유전자 놀이나 하고 있을 때, 나는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마스터 샘플은 이제 없다. 여기에는 오직 왕만이 존재할 뿐이다."

내 선포가 끝나자마자 통신 장비에서 날카로운 비프음이 울렸다. 벙커 측에서 내 위치를 역추적하거나 장비를 무력화하려고 시도하는 신호였다. 화면 위로 복잡한 코드들이 나열되며 무전 설비를 해킹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그들은 원격으로 내 인지 능력과 생체 변이 수준을 측정하려고 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옥상의 모녀 코어에 접속했다. 민아와 그녀의 어머니로 이루어진 코어는 이미 적들의 침입을 감지하고 있었다. 인간의 뇌와 기계의 연산력이 결합된 코어의 처리 속도는 벙커의 구식 컴퓨터 따위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역공해라. 줄기를 타고 들어가서 그들의 근원지를 찾아내."

내 명령에 모녀 코어의 에너지가 통신선을 타고 역류했다. 해킹을 시도하던 벙커의 신호는 오히려 내 의식의 통로가 되었다. 나는 그들의 방화벽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리고 내부 네트워크로 침투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데이터가 내 뇌로 쏟아져 들어왔다. 벙커의 위치, 내부 구조도, 남아있는 병력의 숫자와 식량 비축량까지 모든 정보가 시각화되어 보였다.

강원도 산악 지대 지하 깊숙이 숨겨진 그들의 기지는 생각보다 거대했다. 하지만 그곳은 요새라기보다 감옥에 가까웠다.

"찾았다."

나는 탈취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의 시스템을 헤집기 시작했다. 관제 시스템의 권한을 강탈하자 벙커 내부에 설치된 자동 방어 시스템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복도에 설치된 센서들을 조작하여 아군과 적군의 식별 코드를 뒤섞어 놓았다. 통신 너머로 경보음과 함께 당황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당장 멈춰! 시스템이 통제 불능이다! 센트리 건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어!"

아까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과학자들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유쾌하게 들렸다. 그들은 폐쇄된 공간 안에서 자신들이 만든 기계들에 쫓기며 서로를 적으로 오인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동안 그 아비규환의 소리를 감상했다.

"이것이 너희가 말한 인류 재건인가? 스스로 만든 장난감에 먹히는 기분이 어떠냐."

비명과 폭발음이 뒤섞인 통신을 나는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주파수 다이얼을 끝까지 돌려 신호를 차단하자 다시 학교에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전리품으로 얻은 데이터 지도를 원정군 대장의 단말기로 전송했다.

운동장에 서 있던 하이브리드 병기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들의 눈에는 살아있는 생물의 생기와 기계의 차가운 안광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나는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 목표가 정해졌다. 저 산속 깊은 곳에 우리 제국을 더 위대하게 만들 기술과 자원이 잠들어 있다."

병사들은 대답하는 대신 무기를 치켜들며 전의를 불태웠다. 벙커의 과학자들은 나를 채취하러 오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이제는 내가 그들을 수확하러 갈 차례였다. 그들이 가진 유전자 조종 기술과 정밀 기계 설비들은 내 요새를 완성할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될 것이다.

나는 옆에 서 있던 설비 팀장에게 보급품 확인을 지시했다. 장거리 원정을 위해서는 식량과 에너지가 충분해야 했다. 수력발전소에서 오는 전력은 이미 충분했고, 스마트 팜의 작물들도 수확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모든 하이브리드 대원은 즉시 무장을 점검하고 출격 준비를 마쳐라. 아들들도 동행한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생체 게이트가 지면을 울리며 열렸다. 벙커의 위치는 여기서 약 40km 지점이었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며칠이 걸릴 거리였으나, 진화한 내 군대에게는 반나절 거리도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벙커의 내부 구조도를 떠올렸다. 그곳의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고 있겠지만, 이미 그들의 집은 내가 보낸 유령들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운동장으로 내려가 장갑차 위에 올라탔다. 쇠붙이의 차가운 질감이 신체를 통해 전해졌다. 옆에 서 있던 체육 특기생 출신 추적자가 내 손을 잡으며 복종의 눈빛을 보냈다. 그녀의 팔에 돋아난 합금 발톱이 햇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가자. 가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전부 빼앗아라."

나는 요새의 정문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원정군의 발걸음이 지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학교 전체로 퍼져 나갔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옥상의 거대한 고치 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민아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이 건물 안에 가득한 나의 여성들을 생각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학교는 더 이상 단순한 학교가 아닐 것이다. 산 너머의 기술력을 흡수한 이 요새는 멸망한 세계 위에서 영원히 불타지 않는 신의 성전이 될 것이다. 나는 거침없이 전진하는 군단의 선두에서 벙커의 좌표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장갑차의 엔진이 굉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숲을 가로지르는 은색 거미줄들이 우리를 배웅하듯 파르르 떨렸다. 나는 주머니에서 무전기 파편을 꺼내 바닥에 던져 버렸다. 이제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오직 정복과 흡수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안개가 자욱한 숲길을 지나 본격적으로 벙커가 있는 산맥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멀리서 벙커의 외부 방어선이 작동하는지 낮은 진동이 지면을 타고 전해져 왔다.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손가락을 튕겼다. 뒤를 따르던 아들들이 괴성을 지르며 숲속으로 먼저 뛰어들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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