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삐- 삐- 삐빅. 삐-.
고요한 사막의 밤을 가르던 전보 수신음이 뚝 끊기자, 간이 막사엔 숨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잉크 냄새와 화약 연기가 뒤섞인 탁한 공기 속에서,
주변의 칙칙한 색감과 유독 대비되는 그 흰 피부,
건장한 체구의 '코라'는 깊게 들이마신 공기를 거칠게 토해내며 목울대를 한 번 울렸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긴장감이 실내를 스치자,
부하들은 어깨를 바짝 좁힌 채 눈길조차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폈다.
쨍그랑!!!
코라는 바닥에 널브러진 쇠봉을 들어올리더니 옆에 있던 술병을 박살 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독한 술 냄새가 막사 안에 진동했다.
콰앙!
쇠로 된 테이블을 마치 발로 박살 내겠다는 듯 사정없이 걷어차는 순간,
금속이 비명처럼 울리며 벽으로 날아가 쾅 하고 부딪혔다.
그 순간을 지켜보던 몇몇 부하들이 놀라며 조심스레 뒷걸음질 쳤다
그 멍청한 새끼! 그 돌대가리 새끼가 결국 일을 저질렀어!
눈이 분노로 시뻘겋게 충혈되어있는 코라는 머리를 감싸 쥐며 포효했다.
동시에, 그들의 눈에는 무모한 돌격으로 생사불명이 된 둘째,
코티에 대한 원망과 막연한 불안감이 뒤섞여 있었다.
형님! 당장 제가 놈들을 이끌고 그 빌어먹을 마을로 쳐들어 가겠습니다!
코티 형님을 모욕한 놈들의 대가리를 전부 깨부숴 버릴 겁니다!
핏기 어린 얼굴의 막내, 코아노가 권총을 빼 들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형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그것을 감추려는 허세가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코라는 그의 앞을 막아서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닥쳐! 너마저 그놈처럼 개죽음당하는 꼴을 보라고? 바르톨로뮤 님께서 직접 전보를 보내셨다!
코라는 으르렁거리며 구겨진 종이를 코아노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들어라! '변수'... 바르톨로뮤님이 뭔가를 해결해 주신다 하셧다!
그런데 코티, 그 등신이! 모든 걸 망쳐놨어! 명령을 어기고, 우리 형제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코라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세게 내리쳤다.
분노와 함께 형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의 이성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는 코아노의 멱살을 잡아챘다.
똑똑히 들어, 코아노. 우리 보스의 목을 딴 그년을 갈가리 찢어 죽여야 해!!!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바르톨로뮤 님의 계획대로 움직인다. 그게... 죽은 코티를 위한 길이기도 해.
그의 목소리가 끝내 가늘게 떨렸다. 복수심과 형제애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맹수의 울음 같았다.
코아노는 이를 악물었지만, 형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그 무거운 침묵은 방 안을 짓누르듯 내려앉았고, 누구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공기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9장 : 의뢰>
다음 날 아침, 마을의 보안관 사무소 유치장은 기묘한 활기로 가득 찼다.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먼지를 비추는 가운데,
어제의 치열했던 전투가 무색하게도 포로들의 안색은 윤기가 흘렀다.
특히 코티는 마치 휴가를 온 사람처럼 태평하게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자자, 여기 특제 콩 스튜 대령이오!
어제 고생들 많았으니 특별히 콩 두 알 더 넣었수다!
털뭉이 삐걱거리는 식사 카트를 밀고 들어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코티의 식판을 창살 사이로 밀어 넣어 주며, 나무 잔을 하나 꺼내 들었다.
어제 내가 헤까닥 해서 술병으로 머리 깨버린 친구들은 콩 세알 더 넣었으니 기분풀라고!
뭐, 어제는 총부리 겨누고 싸웠지만, 오늘은 한솥밥... 아니, 한 유치장 밥 먹는 사이 아니겠냐?
자, 이 물이라도 한잔 받으라구! 짜안~!
에잉 털복숭이 양반.. 우리도 좀 심했어~
이렇게 너스래 좋은 사람인줄 알았으면 진작에 말로 할껄 그랫지!
하하! 하루만에 다 나앗다구!!
마쟈마쟈! 어제 일을 모두 잊고 먹고 마시자고! 짜안~!
털뭉이 자신의 물잔을 창살에 가져다 대자,
코티는 너스래 웃으며 자신의 식판에 놓인 물잔을 들어 마주 댔다.
깡!!
맑고 경쾌한 소리가 유치장 안에 울렸고, 코티의 부하들도 덩달아 낄낄거리며 물잔을 부딪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죽이려 들던 이들의 모습이라고는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하아... 진짜 가지가지들 한다...
한쪽 구석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무기는 그 모습을 보고 깊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태평한 놈들을 상대로 어제 그렇게 긴장했다는 사실이 허무할 지경이었다.
그는 시끄러운 술자리 같은 유치장을 애써 무시하며,
책상 위 '골드러시 컴퍼니' 관련 기사가 실린 낡은 신문들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신문에는 철도 부설, 토지 매입 같은 그럴듯한 사업 계획들만 가득했고, 파헤칠수록 가닥은 잡기 어려워 보였다.
밤새 별일 없었어?
어제는 카라 누님한테 아주 박살이 나는 것 같더니만..
막... 끔찍한 고문 같은 거 당한 건 아니지?
털뭉이 호들갑을 떨며 묻자, 코티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제 먹다 남은 빵조각을 입에 쑤셔 넣었다.
흥! 그깟 계집애한테 뭘 당했다고. 그저... 아는 게 없으니 말해줄 것도 없었을 뿐이야.
우린 그냥 코라 형님을 도우러 온 거야. 원래 맡던 직책도 때려치우고!
원래 하던 일이라니, 그게 뭔데?
물! 샌드스톰 일대의 모든 수자원은 전부 우리 형제가 관리했다고!
그 황야에서 물이 곧 돈이고 권력인 건 알지?
두목과 부두목은 그런 주우우웅~요한 일을 하던 사람들이란 말이야! 멋지지?!
반대편 사무실,
밤새 이어진 대화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카라가 턱을 괸 채 텅 빈 눈으로 코티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뭘 더 알아내겠다고 밤을 새운 거야... 내 동생. 얼굴이 반쪽이 됐네..
이렇게 수척해져서 누가 데려갈란가 모르겠다~
시끄러.. 진짜 아무것도 몰를줄은 몰랏지..
그냥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멍청이야..
혼자 뚝딱 해결했다고 칭찬받을 생각에 눈이 멀어서 달려들었다는게 말이되?!
카라의 반응에 마데는 피식 웃음을 지었고, 그녀는깊은 피로와 함께 떨쳐낼 수 없는 의문감을 품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류지가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서류 몇 장이 들려 있었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카라를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밤새 잠 못 이룬 건 그쪽만이 아닌 것 같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일주일 뒤, 이웃 마을인 해도리스에서 '선셋 페스티벌'이 열릴거야.
우리 마을에서는 마데가 참여 할거고, 축제 기간 동안 마데의 호위를 맡아줬으면해.
카라는 류지의 이야기를 듣고는 술에서 취기가 깬것처럼 눈을 번쩍뜨며 마데를 바라봤다.
놀라서 자신을 쳐다보는 카라의 시선을 느꼇는지, 마데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재빠르게 메롱 거렸다.
원래는, 외부인들로 부터 마데의 안전을 보장하는 단순한 의뢰일 예정이였어 하지만
코티의 말을 들어보니 '바르톨로뮤'나 '블랙스모크' 놈들이 축제에 나타날 가능성이 높...
너 뒤졌어...!!!!
류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라는 의자에서 튀어나오듯 마데에게 돌진했다.
축제를 즐기는 척하면서 그놈과 '블랙 스모크'의 동향을 파악ㅎ....
으아아앙!!! 날 내버려둬!!!
마데의 처절한 비명이 사무실을 울렸다.
카라는 마데의 머리 위에 올라타 그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리며 잘근잘근 깨물었다.
류지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 듣고 있니?;;;
크르르... 아득..빠득..
류지의 나직하지만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카라는 마데의 머리에서 눈동자만 홱 돌려 그를 마주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부릅뜬 그녀의 눈은 '전부 다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해봐라'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내고 있었다.
첫째, 축제 기간 동안 마데의 신변 보호.
둘째, '바르톨로뮤'라는 놈을 찾아내 정체를 확인할 것.
셋째, '블랙 스모크'의 잔당이 나타나면 그들의 목적과 규모를 파악한다.
의뢰금은... 금괴 두덩이. 어때, 할 만 한가?
류지의 말에 카라는 마데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더 쥐어뜯으며 그를 놓아줫어.
음! 마음에들어! 수락하지!
수락이고 뭐고...
머리 다 망가졌잖아! 너 때문에 내 고귀한 이미지가...!
고귀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냥 '고기'겠지. 축제 가서 구워지기 딱 좋게 생겨서는!!
카라가 으르렁거리며 받아치자, 마데는 질색하며 그녀를 밀어내려 애썼다.
마데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카라의 눈빛이 서서히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고,
류지를 그런 둘을 걱정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놈들 둘만 보내는게 괜찮은건가..라고.
(일주일 뒤)
삐걱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축제의 활기찬 소음이 뒤섞여 귓가를 간질였다.
해도리스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색색의 깃발과 장식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마데는 느긋하게 고삐를 쥐고 있었지만, 옆자리에 앉은 카라의 어깨는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플래시백)
바르톨로뮤가 이번 페스티벌에서
무엇을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그렇게 사람 많은 자리로 나오는 데엔
분명한 목적이 있을 거야.
게다가 호위로 블랙 스모크 놈들까지 데리고 올 테니,
페스티벌 기간 동안만큼은 마을을 습격할 일은 없을 거다.
일주일전 류지의 말을 곱씹으며, 그녀의 시선은 축제의 화려함이 아닌,
빈 마을을 지키고 있을 류지와 리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너무 무책임하게 우리만 빠져나온 것 같아서... 마음이 영 좋지 않네...
나직이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마데는 힐끗 동생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잠시 고삐를 놓아두고는, 마치 마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기억나, 카라? 어렸을 때 네가 아끼던 유리구슬을 잃어버렸다고 온 동네를 울면서 뒤지고 다녔던 날 말이야.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느닷없는 옛날이야기에 카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마데를 바라보았다.
그는 장난끼 가득한 푸른 눈동자로 푸근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걱정 마, 내가 구슬보다 훨씬 더 반짝이는 걸 찾아줄게!'
해놓고는, 뒷산에서 반딧불이 한 병을 가득 잡아다 줬잖아.
넌 그거 보고 또 좋다고 방방뛰엇고.
언제쩍 이야기를.. 그게 지금 뭔상관인데..
류지 보안관이 없을땐, 무기가, 그리고 무기가 없을 땐... 그래,
리오나 털뭉이라도 어떻게든 지켜낼 거야.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니까.
그러니 지금은 눈앞의 축제를 즐기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
뭐야 그게.. 바보같게..
능청스럽게 툭 던진 마데의 말에 카라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돌렸지만,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던 무거움이 조금은 걷히는 듯하며,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어깨에서도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마을의 초입을 통과할때,
옆 철로를 따라 거대한 증기기관차가 굉음을 울리며 지나갔다.
차창 너머에서는 축제의 열기에 들뜬 사람들의 웃음과 노랫소리가 흘러들어왔고,
화려한 옷차림과 장신구를 두른 이들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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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기... 저 사람, 총잡이 카라 아니야?
누군가의 외침이 군중 사이를 가르듯 번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로 쏠렸고, 금세 마차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계나 두려움 대신, 오래된 영웅을 만난 듯한 순수한 경외와 반가움이 가득했다.
세상에, 진짜 카라다! 4년 전 '레우스빌'에서 제 사과 농장을 지켜주셨던 걸 기억하십니까!
제 딸이 탄 열차를 지켜주셨잖아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이 술이라도 받아주세요!
투박한 병에 담긴 위스키가 카라의 품에 안겼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가장 좋은 것들을 마차에 밀어 넣으며 그녀의 이름을 연호했다.
카라는 당황스러움과 벅차오르는 감정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자괴감에 사로잡힌 자신이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빛나는 희망이자 구원이었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마데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카라쪽을 슬쩍 바라봣다.
방방거리던 애가 어느새,
구슬을 잃은 사람들의 반딧불이가 돼 버렷잖아?
<10장 : 샴페인과 그림자>
사람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마데는 익숙하게 마차를 주차 구역에 세웠다.
그는 마차에서 내리며 기지개를 켜고는, 짐을 내리는 카라에게 말했다.
자, 그럼 오빠는 대회 준비하러 가볼게.
대회장은 공개적인 자리라서 함부로 습격하기 어려울테니, 축제나 즐기고 있어.
너무 굳어있지 말고~
내가 나이가 몇인데 어린애처럼 다루냐.. 오빠도 할일 잘하라고.
마데는 자신의 바텐더 도구가 든 가방을 챙겨 들고는 유유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카라는 잠시 어색하게 서 있다가,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어~ 여행객 양반! 먼 길 오느라 목 타지 않았소? 차가운 레몬 소다 한 잔이면 갈증이 싹!...
.
이리 와보슈! 오늘만 파는 황금 사과 파이요! 한 입 베어물면 신세가 펴진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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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만 하지 말고 들러보슈! 사막에서 건져 올린 진짜 선인장 꿀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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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이녀석들, 반짝이는 마법 모래보러왔구나? 자! 이건 서비스다!!
중앙 광장으로 향하는 길 양옆으로는 각양각색의 노점들이 즐비했다.
지글거리는 소시지 굽는 냄새와 달콤한 솜사탕 향기가 뒤섞여 코를 자극했고,
아이들은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그린 채 뛰어다녔다.
한쪽에서는 어릿광대가 저글링 묘기를 선보이며 사람들의 웃음보를 터뜨렸고,
다른 한쪽에서는 악단이 경쾌한 연주로 흥을 돋우고 있었다.
카라는 발걸음을 옮기다 무심코, 장신구를 파는 노점 앞에 멈춰 섰다.
이 반지 봐보슈! 태양 아래서 보면 불꽃처럼 빛난다니까! 축제에서 눈길 좀 받고 싶다면 이만한 게 없어!
그녀가 노점 앞에 서자 상인의 들뜬 목소리가 매대 위를 뜨겁게 울렸다.
호객행위를 하며 이것저것 흔들어 보이는 상인의 목소리는 카라의 귀에 제대로 닿지도 않았고,
정교하게 세공된 사파이어 귀걸이만이 카라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잠시 그것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노점을 벗어났다.
지금은 이럴떄가 아니야..
하지만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코라나 그의 부하들, '블랙 스모크'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축제의 평화는 완벽해 보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해는 뉘억뉘억 지기시작했고 그녀는 기지개를 피며 돌아가기로 했다.
카라는 축제의 중심부로 걸음을 옮기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널찍한 공터에 도착했다.
그곳은 야외 바텐더 대회가 한창 열리는 장소로, 이미 무대 주변은 관람객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각양각색의 모자를 쓴 여행객들, 손에 음료나 간식을 들고 즐거워하는 마을 사람들,
환호와 기대가 뒤섞인 소음이 공터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카라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타이밍이 절묘하게도, 마침 다음 순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그 순간, 마데가 자신만만한 발걸음으로 단상 위에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관중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모으며
슬쩍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준비된 바 테이블 앞에 섰다.
카라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데가 어떤 퍼포먼스를 펼칠지 모르는 묘한 기대감에 눈썹을 살짝 올렸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밤, 이 황금빛 강물이 여러분의 갈증을 씻어내고, 별처럼 터지는 기쁨을 선사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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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터져 나온 황금빛 샴페인 포말이 무대 조명을 받아 보석처럼 흩뿌려졌다.
관중들의 열광적인 함성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카라의 귀에는 오직 리드미컬하게 셰이커를 흔드는 소리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언제나처럼 유쾌하고, 자신만만하며,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오빠.
그의 손놀림과 저 여유로움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라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늘 자신이 오빠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자신이야말로 그의 빛에 기대어 어둠을 견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데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고, 사회자는 다음 순서를 위해 무대에 올랐다.
정말 멋진 무대였습니다! 마데씨에게 다시 한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자, 다음은 특별 순서입니다!
해도리스 마을의 미래를 책임질 위대한 투자자,
'골드러시 컴퍼니'의 바르톨로뮤 이사님을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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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뮤', 몇 날 며칠을 뒤쫓아온 이름.
카라의 등골을 타고 서늘한 전기가 번쩍하고 쳤고, 시야가 가늘게 좁혀지며 눈 끝에서 살기가 스며 나왔다.
주변의 환호가 멀리 묻히고,
그녀의 시야에는 단 한 사람만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요란한 소개와 함께, 값비싼 정장을 빼입은 중년의 남자가 연단으로 올라섰다.
풍채 좋은 몸집, 기름을 발라 넘긴 머리, 그리고 손가락마다 번쩍이는 보석 반지.
누가 봐도 막대한 부를 가진 사업가였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마이크 앞에 섰다.
친애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골드러시 컴퍼니'의 이사, 바르톨로뮤라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선셋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이 낡은 서부에 새로운 황금기를 가져다줄 위대한 계획을 발표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순간, 카라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3년 전, 샌드스톰 마을 외곽의 허름한 주점. 칸막이 너머, 어둠 속에 얼굴을 가린 채 의뢰 내용을 설명하던 남자.
혼란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어째서 저 자가 여기에. 어떻게 저 목소리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거지.
머릿속에서 수만 개의 의문이 뒤엉키며 그녀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3년전 플래시백)
샌드스톰을 장악한 보스를 처리해주세요...
돈을 얼마가 되든 상관없으니.. 고통받는 저희를 구해주세요..
똑같았다. 억양, 높낮이, 심지어 단어 끝을 미묘하게 늘이는 습관까지.
수많은 전장을 거치며 단련된 그녀의 감각이 경고등을 울렸다.
바르톨로뮤는 연단 위에서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의 목소리는 교묘하게 슬픔과 분노, 그리고 희망을 오가며 군중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여러분, 이 황량한 서부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금? 아닙니다. 바로 물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자, 우리의 미래 그 자체이지요!
그의 말에 군중 속에서 공감의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훑어보듯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불과 3년 전, 저 샌드스톰 지역에서는 탐욕스러운 악당들이 그 생명줄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골드러시 컴퍼니'는 본래 그 지역의 수자원을 공정하게 관리하여 모두에게 나누어주려 했으나,
무자비한 폭력 앞에 그 권리를 빼앗기고 말았지요.
그들은 물을 무기 삼아 사람들을 착취하고, 메마른 땅에서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갔습니다!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진실을 교묘하게 비틀어 자신들을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그의 궤변에
카라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연설에 완전히 몰입한 사람들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악당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바르톨로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하지만!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나는 법! 절망의 땅에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난 영웅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홀로 악의 소굴로 뛰어들어 탐욕스러운 보스의 심장에 총알을 박아 넣고, 굳게 닫혔던 수문을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그리하여 샌드스톰에 다시 생명의 물줄기가 흐르게 만들었지요!
그는 극적인 순간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른 뒤, 손을 뻗어 정확히 군중 속에 서 있는 카라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위대한 영웅이,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 샌드스톰의 해방자,
총잡이 카라에게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십시오!
...뭐?
카..라..?
스포트라이트가 카라를 비추는 순간, 주변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놀란 듯했으나,
이내 '영웅'의 등장에 열광하며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카라! 카라!" 그녀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축제장을 뒤덮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연설을 듣던 카라도,
무대를 벗어나 바르톨로뮤의 등장을 지켜보던 마데도 벙쪄서 말문이 막혔다.
자, 영웅이시여! 부디 이 연단 위로 올라와 주십시오! 당신의 위대한 업적에 걸맞은 찬사를 받을 시간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길을 터주며 그녀를 무대 위로 떠밀었다.
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의 한가운데에 던져졌다.
자신을 영웅으로 치켜세워 대중 앞에 고립시키고, 그의 거짓된 연극에 동참시키는 잔인한 각본.
수많은 사람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마치 거대한 감옥의 벽처럼 카라를 옥죄었다.
그녀는 천천히, 하지만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연단에 올랐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의 바로 옆에 서자마자,
카라는 관중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직하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르톨로뮤는 그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친근하게 카라의 손을잡고 하늘을 향해 들어올리며, 마이크에 대고 열정적으로 외쳤다.
보십시오, 여러분! 이 겸손한 영웅의 모습을!
그녀는 자신의 위업을 드러내길 원치 않지만, 진실은 알려져야 마땅합니다!
그는 잠시 카라에게로 고개를 돌려,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비열하게 속삭였다.
영웅에겐 영웅 대접을 해줘야지, 안 그런가? 3년 전, 당신은 내 의뢰를 완벽하게 해냈어.
덕분에 샌드스톰의 악당들은 사라졌고, 난 그곳의 수자원을 확보해 사람들에게 평화를 되찾아줄 수 있었지.
불타버린 권리증서를 우리것으로 만드는데 시간이 많이 걸렷지만.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자야, 카라.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나를 치켜세우면, '블랙 스모크' 녀석들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
복수의 칼날이 누구에게 먼저 향할지, 아직도 감이 안 오나?
그의 입에서 나온 교묘하게 뒤틀린 거짓말에 카라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녀의 협박에 가까운 경고에도 바르톨로뮤는 코웃음 치며 여유롭게 받아쳤다.
아, 그 바보 형제들 말인가? 걱정할 것 없어. 그들은 지금 여기 없으니까.
뭐..?
그들은 마을을 '해방'시키고 있을 거야. 내가 약속했거든.
샌드스톰의 복수를 할 기회를 주겠다고. 당신을 여기 묶어두는 대신 말이야.
바르톨로뮤의 마지막 말이 카라의 귓가에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류지와 리오, 그리고 무고한 사람들. 자신이 이곳에서 영웅으로 추대받는 동안,
그들은 지옥의 한가운데에 던져진 것이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감각과 함께, 카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계획된 함정이었다.
카라의 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 폭발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찰칵! 퍼벙! 찰칵!
눈앞에서 연쇄적으로 터져 나오는 마그네슘 플래시 불빛이 그녀의 시야를 새하얗게 불태웠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의 섬광과 함께 터져 나오는 셔터 소음이 그녀의 분노를 강제로 집어삼켰다.
전설적인 영웅의 탄생, 그 역사적인 순간을 담으려는 사진사들의 열기가 무대를 뜨겁게 달구었다.
..화낼 것 없어, 카라. 당신이 죽인 그 녀석, 사실은 마음이 아주 약한 놈이었거든.
고아 녀석들을 거둬서 자기 수자원을 관리하게 시키고,
정말 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공짜로 나눠주던 그런 위선자였지.
멍청하게도 말이야. 그게 얼마나 큰돈이 되는 줄도 모르고.
그의 말은 카라의 기억을 헤집어 놓았다. 의뢰 내용, 표적의 정보,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자신이 정의를 위해 당겼다고 믿었던 방아쇠가, 실은 한 남자의 선의를 꿰뚫어 버린 흉기였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에게 사업을 제안했어. 함께 서부 최고의 부자가 되자고. 그런데 글쎄, 그 멍청이가 나에게 총을 겨누지 않겠나.
'이 물은 모두의 것'이라는 시시껄렁한 소리를 지껄이면서 말이야.
바르톨로뮤는 카라의 어깨를 힘주어 잡고, 사진기자를 향해 미소지으며,
마치 오랜 친구에게 감사를 표하듯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했던 거야. 그리고 당신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지.
너가 사라진 마을을 우리가 폭파시키고, 코라 녀석에게 모든게 네 짓이란걸 말했을때.
얼굴이 얼마나 장관이였는지!! 너가 그 얼굴을 봣어야 하는건데 하하하!!!
덕분에 샌드스톰은 내 것이 되었고,
이제는 네 마을 차례야.
이렇게 친히 마을까지 떠나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카라! 당신이야말로 내 진정한 '영웅'이야!
영웅이라는 단어가 조롱처럼 카라의 심장에 박혔다.
눈앞에서는 여전히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고, 군중의 환호성은 멀게만 들려왔다.
그녀는 거대한 연극의 광대가 되어, 가장 끔찍한 진실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영웅...? 내가?)
그녀의 머릿속은 하얗게 타오르고 동시에 새까맣게 꺼져내렸다.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계획과 선택, 그리고 그 결과가
순간적으로 뒤엉켜 끔찍한 침묵만을 남겼다.
도망치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
그리고...
사라지고 싶을 만큼 무너졌다.
그때였다.
흐릿해진 시야의 한복판에, 사람들 틈 사이로
마데가 보였다.
걱정과 당혹, 그리고 카라가 이해할 수 없는 따뜻함이 뒤섞인 표정.
그 표정이 그녀의 폐부를 다시 후벼팠다.
카라는 더 이상 그 위선적인 연극의 주인공으로 서 있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불타는 것 같았다.
류지, 리오, 무기, 털뭉이... 불길 속에 잠길 마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대로 도망치듯 연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발목이 꺾일 뻔했지만, 그런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갑자기, 어디 가는거에요?! 우리의 영웅!!!
샌드스톰의 영웅!
영웅씨!! 손 한번만 잡아주세요!!!
그녀의 돌발 행동에도 군중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사람들은 그녀의 길을 막아서며 손을 뻗고,찬사를 보내고, 축복을 외쳤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순수한 존경과 감탄이 카라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자신은 영웅이 아니었다.
살인자이자,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린 어리석은 광대일 뿐이었다.
사람들의 어깨를 거칠게 헤치며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그에게 달려갔고,
마데는 달려오는 카라의 위태로운 모습에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카라! 괜찮아? 위에서 무슨 일이 있던거야..
마데는 그녀의 패닉상태에 어찌할 줄 몰라 그녀의 등을 가볍게 쓸어줬고,
카라는 마데의 팔을 붙잡고, 헐떡이는 숨 사이로 간신히 절망에 가득한 말을 쥐어짰다.
오빠. 마을이... 우리 마을이 위험해. 놈들의 함정이었어!!!! 전부 다...!!!!!
그녀의 귀에 주변의 환호성은 더욱 끔찍한 소음으로 변해 가고 있엇고.
눈동자는 공포와 자책감으로 가득 차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영웅이라는 칭호가, 마치 사형 선고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에필로그>
평화롭던 마을의 저녁 하늘은 순식간에 붉은 화염과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해도리스 마을에서 축제의 폭죽이 터져 오를 때, 고향 마을에서는 총성이 폭죽 소리를 대신했다.
탕! 타타탕!
끼기긱...쿠웅...!!!!
마을 입구의 허술한 바리케이드를 증기 트랙터로 뭉개버린
'블랙 스모크' 단원들이 괴성을 지르며 마을 광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선두에 건장한 사내, 코라가 라이플을 하늘 위로 쏘아 올리며 포효했다.
이 마을은 이제부터 우리의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 아무도 죽이지 마라!!
몽땅 생포한뒤, 카라 그년이 오면 눈앞에서 몽땅 처형이야!!!
그의 옆에서 권총을 든 코아노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민가의 유리창을 향해 총알을 퍼부었다.
들었냐, 이 벌레들아!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으면 순순히 생포되란 말이야!!!!
마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사람들,
약탈을 시작하는 악당들 사이로 두 개의 그림자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모두 위그드라실쪽으로 피해요! 어서!
리오.. 이놈들, 수가 너무 많아! 카라 누님은 언제 오시는거야?!
리오가 머스킷을 쏘아대며 주점으로의 대피로를 확보했고,
그의 곁에서 털뭉이가 리볼버를 연사하며 소리쳤다.
마을의 통신 시설은 먼저 파괴되었고, 마을의 주요 길목은 순식간에 차단되었다.
류지와 무기는 마을 외곽에서 침입을 저지하려다 수적 열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다.
류지가 샷건으로 적 두 명을 동시에 날려버렸지만, 등 뒤에서 날아온 밧줄 올가미가 그의 몸을 옭아맸다.
큭...! 내가 이딴거에...
처음뵙겠수 보안관 나리,
개인원한은 없지만, 난 이 마을을 먹어야겠어.
균형을 잃고 쓰러진 그의 머리에 차가운 총구가 겨눠졌다.
무기 역시, 이미 여러 명의 악당에게 포박당해 무력하게 무릎 꿇려 있었다.
저항하던 민병대들도 하나둘 쓰러져 갔고, 마을은 절망의 그림자에 잠식되고 있었다.
이 비겁한 놈들...! 당장 그만둬!!
그의 저항은 맹렬했다. 건장한 남자 서넛이 달려들어 겨우 그를 짓눌렀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류지의 거친 숨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그 모습을 본 코아노가 신이 난다는 듯 형에게 다가가 물었다.
형님, 저놈 꽤나 성가신데. 본보기로 한 명쯤 조용하게 만들어도 되지 않겠어? 그래야 다른 놈들도 얌전해질 텐데.
아니. 죽이지마. 저항하는 인간의 마지막은... 더 비참해야 값어치가 있는 법이다.
저놈이랑 부관 놈, 둘 다 꽁꽁 묶어서 마을 광장 분수대에 매달아 놔라. 모든 주민이 볼 수 있도록.
코라의 명령은 잔인했다. 그것은 단순한 제압이 아니라,
마을의 자존심과 희망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려는 의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류지와 무기는 온몸이 밧줄로 묶인 채 광장 중앙 분수대의 기둥에 무력하게 매달렸다.
물이 쏟아져 나오는 가고일 석상 아래, 두 사람은 마치 희생 제물처럼 전시되었다.
그들의 눈은 아직 꺼지지 않은 저항의 불꽃으로 타올랐지만, 몸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 끔찍한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의 눈에 공포와 절망이 깃들었다.
자신들을 지켜주던 보안관의 무력한 모습은, 마을의 희망이 끊어졌음을 알리는 잔인한 선고와도 같았다.
마을은 확보했으니.
이제는 개인적인 원한의 시간을 즐기자고.
자.. 어서와라 카라.. 우린 준비되어 있다.
그의 발밑에서는 민병대의 저항이 힘없이 꺾여가고 있었고,
증기 트랙터의 육중한 소음이 무너지는 민가의 비명과 뒤섞여 울려 퍼진다.
코라의 웃음소리가 총성과 화염 속으로 서서히 흩어지고,
마을의 하늘은 희망을 삼킨 절망의 연기로 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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