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on November 1, 2026

Chapter 1: 같은 세트, 다른 온도

새벽 네 시의 촬영장은 냉기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스튜디오 조명이 열을 내뿜는데도 발목은 시렸다. 서윤은 얇은 가운을 여며 어깨를 돌렸다. 어제 밤새 대본을 외웠더니 목덜미가 굳어 있었다.

"서윤 씨, 준비됐죠?"

감독이 모니터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세트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 반대편에서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지연이었다. 검은 란제리 차림에 가운을 반쯤 걸친 모습이었다. 서윤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지연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같은 카메라 앞에 섰다. 감독이 구도를 잡느라 카메라를 좌우로 움직이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훑었다. 서윤은 지연의 허리선을 봤다. 출산 후에도 그대로였다. 운동으로만 유지할 수 있는 선은 아니었다. 지연도 서윤의 가슴골을 응시했다. 서윤은 그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정확히 알았다.

"둘 다 각도 틀어주세요. 지연 씨는 왼쪽으로, 서윤 씨는 오른쪽."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움직였다. 턱을 당기고 어깨를 펴는 동작까지 비슷했다. 서윤은 지연의 호흡 소리를 들었다. 짧고 규칙적이었다. 연습한 사람의 호흡이었다.

"컷. 좋아요. 한 번 더."

서윤은 손끝을 세워 지연의 어깨를 스쳤다. 연기상 필요한 접촉이었다. 지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서윤의 귀에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 떨리네."

서윤은 웃었다. "피곤해서 그래. 어제 밤에 좀 늦었거든."

"남편이 기다리던가?"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네 남편이나 챙겨."

지연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감독은 그 미세한 변화를 못 봤다.


휴식 시간은 십오 분이었다. 서윤은 스태프 테이블에서 커피를 받아 들고 세트 뒤편으로 걸어갔다. 감독이 모니터 옆에서 지연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윤은 발소리를 죽였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독님, 이번 씬에서 제 클로즈업을 좀 더 잡아주시면 안 될까요? 표정 연기가 중요한 부분이라서요."

지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감독이 뭔가 대답하려는 찰나, 지연이 말을 이었다.

"서윤 씨 분량이 좀 많은 것 같아서요. 전체 균형을 생각하면 제 쪽을 살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감독이 잠깐 침묵했다. 서윤은 벽에 등을 기대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다. 혀끝이 얼얼했다.

"검토해볼게요."

감독의 대답이었다. 서윤은 벽에서 등을 떼고 소리 나게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봤다. 서윤은 지연을 보며 웃었다.

"감독님, 제 컷은 제가 제일 잘 알아요. 필요하면 다시 찍어도 되고요."

지연의 표정이 굳었다. 감독은 어색하게 웃으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서윤은 자기 대기 의자로 돌아왔다. 의자 옆 테이블에는 지연의 커피가 놓여 있었다. 아직 김이 나는 걸 보니 방금 스태프가 갖다준 모양이었다. 서윤은 자기 컵을 들고 일어섰다. 팔꿈치가 테이블 모서리에 닿는 순간, 손이 미끄러졌다.

커피가 지연의 컵 위로 쏟아졌다. 검은 액체가 지연의 가운 위로 흘러내렸다.

"아."

서윤은 짧게 내뱉었다. 사과는 하지 않았다. 지연이 세트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 삼 초도 걸리지 않았다. 지연은 서윤의 가방을 발로 밀었다. 가방이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안에서 파우치와 스크립트가 쏟아졌다.

"미안. 발이 미끄러졌어."

지연이 말했다. 어조에 미안함은 없었다. 서윤은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내려다봤다. 스태프들이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윤은 무릎을 굽혀 물건을 주웠다. 손이 떨리지 않게 의식했다.

"괜찮아. 어차피 새로 살 거였어."

서윤이 가방을 집어 들며 말했다. 지연은 대답하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등 뒤로 젖은 가운 자락이 흔들렸다.


촬영은 자정을 넘겨 끝났다. 서윤은 분장실로 들어가 조명을 켰다. 거울 앞에는 각 배우의 프로필 사진이 붙어 있었다. 지연의 사진이 가장 최근 것이었다. 지난달에 찍은 화보 컷이었다. 서윤은 사진을 떼어냈다. 광택 용지가 손끝에서 매끄러웠다.

사진을 반으로 접었다. 다시 반으로 접었다. 손톱으로 모서리를 눌러 자국을 냈다. 찢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조각들이 쓰레기통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윤은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씻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삼십 사 년을 살면서 이 정도 표정은 익숙했다.

분장실을 나서는데 복도 끝에서 지연이 걸어오고 있었다. 서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연이 말했다.

"내 사진, 잘 찢었어?"

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쓰레기통은 분장실마다 있으니까."

서윤은 복도 끝 문을 밀고 나갔다. 밖은 더 추웠다. 주차장 조명이 바닥에 노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서윤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핸들을 잡은 손이 아까보다 차가웠다.

집에 가면 남편이 자고 있을 거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다. 서윤은 백미러를 확인하고 차를 후진시켰다. 후방 카메라 화면에 지연의 실루엣이 잠깐 비쳤다. 서윤은 액셀을 밟았다.

아파트 현관문은 소리가 나지 않게 열렸다. 서윤은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 복도로 들어섰다. 거실은 어두웠다. 식탁 위 작은 무드등만 켜져 있었다. 남편이 켜놓은 채 잠든 모양이었다.

소파에는 담요가 반쯤 걸쳐 있었다. 남편은 소파에서 잤다. 침실까지 걸어 들어갈 기력이 없었던 거겠지. 서윤은 담요를 끌어올려 어깨를 덮어주려다 손을 멈췄다. 소파 옆 유리 테이블 위에 태블릿이 놓여 있었다. 화면은 꺼져 있었지만, 충전 케이블이 꽂혀 있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쓰다가 내려놓은 위치였다.

서윤은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남은 미열이 느껴졌다. 남편은 규칙적인 숨을 쉬고 있었다. 코 고는 소리까지 났다. 서윤은 소파에서 한 발짝 물러나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화면을 켰다. 암호는 없었다. 남편은 원래 이런 걸 귀찮아하는 사람이었다.

화면이 밝아졌다. 영상이 재생 중이었다.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앱을 나간 흔적이었다. 재생 목록에 제목이 떠 있었다. 지연의 신작이었다. 두 달 전에 공개된 작품으로, 서윤도 알고 있었다. 포스터에 지연의 얼굴이 크게 박혀 있었다.

서윤은 재생 바를 봤다. 삼십 분쯤 지점에서 멈춰 있었다. 남편이 잠들기 전까지 본 분량이었다. 서윤은 시청 기록으로 들어갔다. 목록이 쭉 내려갔다. 같은 배우의 작품이 네 편 더 있었다. 서윤의 작품은 한 편도 없었다. 맨 위에는 그저께 본 기록도 남아 있었다.

서윤은 화면을 꾹 눌렀다. 캡처가 됐다. 다음 화면도, 그다음 화면도 찍었다. 스크린샷 소리가 났지만 남편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은 휴대폰을 열어 방금 찍힌 사진들을 전송했다. 전송 완료 표시가 뜨는 동안 태블릿 화면이 꺼지지 않게 손가락으로 계속 눌렀다.

캡처본은 갤러리 폴더 하나에 모아 저장했다. 파일 이름까지 그대로 두었다. 서윤은 휴대폰을 진동 없이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태블릿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차례였다. 서윤은 일어나 유리 테이블 앞으로 갔다. 아까 집어 들었을 때의 각도를 기억해냈다. 화면이 소파 쪽을 향해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케이블은 꽂지 않은 상태였다. 서윤은 태블릿을 같은 위치에, 같은 기울기로 내려놓았다. 손끝으로 모서리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완벽하진 않아도 남편이 알아챌 정도는 아니었다.

서윤은 소파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남편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자고 있었다. 팔이 소파 밖으로 축 처져 있었고, 입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서윤은 담요를 원래대로 끌어내려 놓았다. 손대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거실을 나서는 발소리는 최대한 늦췄다. 복도 끝 침실 문을 조용히 닫았다. 불을 켜지 않고 침대 끝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 화면만 켰다. 캡처본을 다시 열었다. 지연의 얼굴이 선명했다. 서윤은 화면을 껐다. 방 안이 다시 어두워졌다.

천장을 올려다봤다.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잠은 새벽 네 시쯤 찾아왔다. 두 시간쯤 눈을 붙였을까. 서윤은 알람 소리보다 먼저 눈이 떠졌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남편은 소파에서 깨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거다. 어제 일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서윤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세수했다. 거울 속 얼굴은 부어 있었다. 화장으로 가릴 수 있는 정도였다. 부엌에 내려가니 남편이 토스트를 먹고 있었다. 뉴스를 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었다.

"어제 몇 시에 들어왔어?"

남편이 물었다. 서윤은 커피포트 버튼을 눌렀다.

"한 시 넘어서. 자고 있었지."

"응. 소파에서 깜빡했나 봐. 허리 아파 죽겠어."

남편이 웃었다. 서윤은 웃지 않았다. 커피가 내려지는 소리만 부엌을 채웠다. 남편은 잠시 뒤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갔다.

"오늘은 늦어. 회식 있어."

"알았어."

문이 닫혔다. 서윤은 커피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휴대폰을 꺼냈다. 어젯밤 저장해둔 캡처본이 그대로 있었다. 서윤은 지연의 번호를 열었다.

이 대화는 반년 만이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지연이 보낸 스케줄 확인 연락이었다. 서윤은 그 아래에 커서를 놓았다.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가 움직였다.

전송을 누르고 휴대폰을 엎어놓았다. 커피를 마셨다. 쓴맛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났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서윤은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휴대폰은 여전히 엎어져 있었다.

답장은 점심때쯤 왔다. 한 문장이었다.

서윤은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태연한 척하는 문장이었다. 서윤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통화 기록 앱을 열었다. 남편과의 최근 통화는 어제 아침이 마지막이었다. 서윤은 남편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총무팀 담당자와 아는 사이였다.

"여보, 오늘 회식 몇 시에 끝난다고 했죠?"

"아, 오늘은 아마 아홉 시쯤? 부장님 일정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전화를 끊었다. 서윤은 노트 앱에 남편의 이번 주 일정을 적었다. 월요일은 야근, 화요일은 회식, 수요일은 정시 퇴근. 지난주에도 비슷한 패턴이었다. 서윤은 지연의 SNS 계정을 열었다. 최근 게시물들이 스튜디오 작업실 사진이었다. 위치 태그가 붙어 있었다.

서윤은 검색창에 그 주소를 입력했다. 지도 앱이 위치를 표시했다. 강남구 논현동, 아파트 단지였다. 남편 회사에서 차로 십오 분 거리였다. 서윤은 화면을 확대해 건물 입구를 봤다. 경비실이 있고 차단기가 있었다.

오후 내내 서윤은 집에 있었다. 드라마를 틀어놓고 봤다.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 여섯 시에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서윤은 답장을 했다.

일곱 시에 옷을 갈아입었다. 청바지에 니트, 겉옷은 검은 코트. 화장은 평소보다 진하게 했다. 향수는 뿌리지 않았다. 향이 남으면 안 되는 날이었다. 현관을 나서기 전에 지갑과 휴대폰을 챙겼다. 차 키도 가방에 넣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예상 소요 시간은 이십 분이었다. 서윤은 안전벨트를 매고 차를 출발시켰다.

도로는 퇴근 시간 막바지로 붐볐다. 서윤은 차창 밖을 봤다. 간판 불빛들이 속도를 늦춘 차들 사이로 번졌다. 신호 대기 중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남편에게서 추가 연락은 없었다. 지연에게서도 없었다.

논현동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여덟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서윤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 경비실 쪽을 봤다. 방문 차량 등록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서윤은 차에서 내렸다. 지도 앱에서 표시한 동을 확인했다. 삼 분쯤 걸어가면 될 거리였다.

단지 안으로 들어서는 인도가 있었다. 서윤은 걸음을 옮겼다. 저녁 공기가 코끝을 시렸다.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속 손이 차가웠다.

해당 동 현관 앞에 섰다. 공동현관은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서윤은 초인종을 눌렀다. 지연의 집 호수를 누르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주소는 이미 확인해뒀다.

응답이 없었다. 서윤은 한 번 더 눌렀다. 이번에는 길게. 잠시 뒤 인터폰에서 지연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구세요?"

서윤은 입을 열었다.

"나야."

침묵이 흘렀다. 인터폰 너머로 숨소리만 들렸다. 서윤은 손을 주머니에서 빼서 초인종 옆 벽에 짚었다. 손바닥이 차가운 콘크리트에 닿았다.

"문 열어. 남편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게 아니야.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긴 정적 끝에 잠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서윤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서윤은 시선을 내렸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지연이 문틈에 서서 서윤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서윤은 문틈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 불빛이 복도까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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