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그 경계에서
카페 문을 열자 종이 달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전역하고 딱 일주일. 아직도 군화 신고 걸어다니던 습관이 남아서 걸음걸이가 어색했다. 주말 오후라 그런지 카페 안은 꽤 붐볐다. 구석 창가쪽에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미정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뭔가를 보고 있는데,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비추고 있었다. 예전에 보던 머리 스타일이랑은 좀 달랐다. 좀 더 길어졌나.
걸어가면서도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입고 있는 니트가 좀 타이트했다. 핑크색이었는데, 그게 왠지 더 신경 쓰였다. 가슴 쪽으로 라인이 확실하게 잡혀 있어서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애매했다. 밖에서 봤을 때도 알 수 있었지만, 앉아 있는 자세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D컵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던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체육대회 준비한다고 같이 앉아서 뭐 만들고 있었는데, 그녀가 옆으로 몸을 기울이는 바람에 우연히 본 거였다. 그 이후로는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특히 군대에 있을 때는 더 심해졌다. 할 게 없는 환경에서 카톡 한 줄 한 줄이 이상하게 뇌리에 박혔다.
"야."
다가가자 미정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얼굴에 금방 환한 미소가 번졌다.
"어, 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 차이는 예전 그대로였다. 내가 좀 크고, 걔는 딱 어깨 정도 오는 키.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친구처럼 지내던 그 거리감이 갑자기 좀 의식됐다.
서로 마주보고 잠시 웃었다. 그러다 미정이 먼저 팔을 벌렸다. 주저할 이유도 없었고, 그냥 가볍게 안아주는 게 맞는 상황이었다. 몸을 앞으로 숙여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니트에 스며든 향수가 코를 찔렀다. 어떤 향인지는 모르겠는데, 달콤하면서도 깔끔한 냄새. 가슴 쪽이 가볍게 닿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재빨리 팔을 풀었다.
"오랜만이다. 완전 삭았네?"
미정이 내 얼굴을 위아래로 훑더니 헛웃음을 쳤다.
"군인 티 팍팍 나."
"뭐 어쩌라고."
자리에 앉으며 그녀도 다시 주저앉았다. 메뉴판을 받아들었다.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뭘 시켜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뭐 마실래? 내가 살게."
"에이, 니가 전역했으니까 내가 사는 거 아니야?"
"됐고, 그냥 마실 거나 골라."
주문하고 나서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미정도 비슷한 자세로 팔을 올렸다. 그사이에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어떻게 지냈냐?"
"뭐, 그냥. 밖에 나오니까 세상이 좋아. 아침에 일어나니까 나가도 된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건지 몰랐어."
"참, 그동안 고생했다."
뭐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다른 데 있었으니까.
몇 분 동안 날씨 얘기, 복학 얘기, 주변 친구들 근황 얘기가 오갔다. 평범한 대화였다. 군대 가기 전에도 이런 식으로 얘기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아는 사람끼리 하는 대화.
근데 오늘은 달랐다.
계속 눈이 갔다. 말하는 동안에도 미정의 입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웃을 때 눈가가 어떻게 접히는지. 예전에는 신경도 안 쓰던 것들인데.
그녀가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며 고개를 돌리자, 니트를 입은 가슴 라인이 좀 더 확실하게 보였다. 군대에서 며칠 동안이나 생각했던 그 장면들이 떠올랐다.
말이 끊겼다.
미정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을 받아들이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했다.
"왜?"
"아니."
입이 마르다는 걸 느꼈다. 말을 꺼내기 전에 침을 삼켰다. 이 얘기를 하려고 오늘 만나기로 한 건 아니었지만, 이 순간이 아니면 평생 못 할 것 같았다.
"있잖아."
목소리가 좀 낮아졌다. 미정의 표정이 궁금한 듯 바뀌었다.
"군대 있을 때 말이야."
잠시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니가 보낸 카톡들."
또 멈췄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맞는 건지,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게 나을지.
"자기는 나올 거다. 나와서 봐라. 그런 거."
미정이 눈을 깜빡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거, 진짜였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지 안 흔들리는지 확인하려는 듯 끝까지 응시했다.
미정이 잠시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웃는 건데, 예전에 보던 그런 편한 웃음이 아니었다. 뭔가 애매한 경계에 서 있는 웃음이었다.
"그냥 농담이었는데?"
가볍게 넘기듯 말하면서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입술을 잔에 대고 조금 마셨다. 표정은 여유로워 보였다. 근데 그 여유로움이 오히려 신경 쓰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 의도가 뭐였어?"
미정이 잔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잔 가장자리를 살짝 스쳤다.
"의도라니."
"그냥 한 말 같지는 않았어."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호하게 나왔다. 군대에서 혼자 누워서 그 카톡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그냥 장난인 줄 알았다. 근데 볼수록 이상했다. 진짜 농담으로 하기엔 표현이 너무 구체적이었고, 타이밍도 이상했다.
자기는 나올 거다. 나와서 봐라.
그 말을 할 때 미정의 표정이 상상이 갔다. 어떤 표정으로 그걸 보냈을까. 웃고 있었을까. 아니면 진지했을까. 그게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냥... 심심해서?"
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그 움직임이 예전처럼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뭔가를 숨기려는 것처럼 보였다.
"심심해서?"
"응. 군인이라 심심할 거 같아서. 놀려준 거야."
그녀의 손이 다시 커피 잔을 향했다. 근데 마시지는 않았다. 그냥 손가락으로 잔을 돌리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다시 말했다.
"너 그런 농담하는 사람 아니잖아."
미정이 눈을 깜빡였다. 그 말에 뭔가 걸린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야. 나 항상 농담하는데."
"다른 농담은 그래. 근데 그건 아니었어."
내가 테이블 위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거리가 좁혀졌다.
"나와서 봐라. 그런 말을 아무한테나 해?"
미정의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숨이 멈췄다.
침묵이 흘렀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커피 머신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우리 테이블만 따로 떨어진 것처럼 고요했다.
미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데 그 목소리는 예전과 달랐다. 가벼움이 사라지고 뭔가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근데."
그녀의 시선이 내 눈을 끝까지 따라와서 고정됐다.
"진심이면 어떻게 할 건데?"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어?"
멍청한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미정은 여전히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게 진심이었다고 쳐. 그럼 넌 어쩔 건데?"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근데 그 안에 뭔가 날카로운 게 숨어 있었다.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도발하는 건가.
나는 입을 열려고 했다. 근데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생각해야 하는데, 도무지 정리가 안 됐다.
만약 그게 진심이라면?
그동안 내가 상상했던 그런 의미였던 거라면?
미정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예전처럼 그냥 친구? 아니면...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근데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근데 그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나는 더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진심이면 어떻게 할 건데?" 그 질문은 내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됐다. 근데 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입술만 달싹이다가 다시 닫혔다.
미정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점점 무거워졌다.
"저기..."
겨우 입을 열었는데,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진심이라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할 거지? 그동안 수없이 상상했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군대에서 혼자 누워서 그렸던 온갖 환상들. 그런데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까 전혀 대비가 안 돼 있었다.
"그게..."
미정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내 더듬거리는 모습에 뭔가 실망한 걸까. 아니면 기대한 걸까.
그녀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좀 거슬렸다.
"나 화장실 갔다 올게."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그녀가 자리를 떴다. 핸드폰도 테이블에 두고 갔다. 가방도 그대로였다. 잠깐만 다녀오겠다는 의미였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타이트한 핑크색 니트 위로 굴곡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걸을 때마다 가슴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옷감 위로 전해지는 그 움직임이 뭔가를 더 자극했다.
저런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예전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미정이 화장실 문 안으로 사라졌다. 철컥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나는 숨을 제대로 쉬었다.
텅 빈 그녀의 자리를 바라봤다. 아까까지 앉아 있던 자리. 커피 잔은 아직 절반쯤 남아 있었다. 손때 묻은 잔 가장자리가 반짝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뭐지, 지금 상황이.
일주일 전만 해도 군대에서 편지나 쓰고 있던 내가, 지금은 여기 앉아서 미정이 던진 폭탄 같은 질문에 대답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말투가 계속 맴돌았다.
진심이면 어떻게 할 건데?
마치 나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 같았다. 아니면 도전장을 내미는 건가. "네가 감히 그런 상상을 하니까 내가 한번 물어보는 거다"라는 뉘앙스도 느껴졌다.
근데 확실한 건, 그녀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거였다.
화장실 문이 열릴까 봐 계속 그쪽을 쳐다봤다. 손가락이 무의미하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시계를 봤다. 3분 정도 지났을까. 근데 훨씬 오래 기다린 것 같았다.
머릿속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예전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이 기회를 잡아야 하는 걸까. 그녀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
모르겠다. 하나도.
그저 텅 빈 의자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답을 정리해야 하는데,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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