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on October 22, 2026

Chapter 2: 독이 묻은 편지

서재의 등불은 늦은 밤까지 꺼지지 않았다. 고성욱은 손가락 사이로 그 편지를 굴렸다. 에스텔의 글씨는 변함이 없었다. 삐딱하게 기울어진 'K'와, 문장을 끝맺을 때마다 과하게 눌러 찍히는 마침표. 그녀가 화가 났을 때 쓰는 버릇이었다. 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필체였다.

편지의 내용 자체는 짧았다. 오래전에 빌린 것을 돌려받으러 왔다. 네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이게 전부였다. 날짜도, 서명도, 출처를 알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없었다. 대신 종이의 질감이 낯설었다. 일반적인 양피지보다 훨씬 매끄럽고, 빛에 비치면 은은한 광택이 돌았다.

그가 편지를 다시 읽으며 종이 가장자리를 문지르다가 멈췄다.

손끝에 남는 이물감이 있었다. 기름기 같은 것이 아니라, 아주 미세하게 끈적거리는 무언가. 그는 편지를 등불 쪽으로 가져가 비스듬히 기울였다. 종이 표면에 얇게 번들거리는 자국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무언가를 발라놓은 것처럼.

고성욱은 책상 서랍에서 작은 유리병과 핀셋을 꺼냈다. 오래된 취미였다. 악녀들의 편지와 선물은 항상 검증을 거쳐야 했다. 그가 정복한 여자들은 대부분 독에 능했다. 아니, 오히려 독에 능한 여자들만 그가 선택했는지도 몰랐다.

그는 핀셋으로 편지 가장자리의 번들거리는 부분을 살짝 긁어 유리병에 넣었다. 병에 든 시약과 섞자 연한 푸른색으로 변했다. 고성욱은 눈을 가늘게 떴다. 청색반응. 아코나이트 계열의 독이었다. 치사량보다 훨씬 적은 양이었지만, 피부로 계속 접촉하면 서서히 심장을 마비시키는 종류였다. 하룻밤 사이에 죽지는 않아도, 일주일이면 맥박이 약해지고 숨이 가빠진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에스텔은 이런 방식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한 방에 끝내는 독을 썼다. 은밀하고, 빠르고, 흔적이 남지 않는 것만 고집했다. 이런 미량의 서서히 작용하는 독은 오히려 다른 사람의 취향에 가까웠다.

고성욱은 팔걸이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바라봤다. 에스텔이 직접 보낸 편지라면, 적어도 이 독 성분은 그녀와 다른 누군가가 추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그녀가 변했거나. 십 년이면 사람이 달라지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녀의 필체와 문장 구성은 옛날 그대로였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편지는 그가 자주 사용하는 서재로 직접 배달되었다. 경비병도, 집사도, 그리고 첩보망도 그 경로를 알아내지 못했다. 궁전의 어떤 문책도 통과하지 않고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내부에서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뜻이다.

그가 직접 세운 왕국의 내부.

고성욱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편지를 봉투 안에 넣었다. 봉투도 같은 재질의 종이였다. 그가 편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라고 하는 군복무 중인 시녀의 발소리였다.

"주인님, 라이라 님이 찾으셨습니다."

"들이게."

시녀가 물러나고 잠시 후 라이라가 서재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붉은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그녀는 흰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얇은 천이 허리선을 따라 흘러내리는데, 드레스 위로 어깨와 쇄골이 드러나 있었다.

"늦은 시간인데 안 자고 있네."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책상 앞에 섰다. 눈빛은 편지를 향했지만, 일부러 보지 않는 척했다.

"보고할 것이 생겨서."

"보고?"

"에스텔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지?"

라이라의 손가락이 드레스 자락을 스쳤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고성욱은 놓치지 않았다.

"아는 이름이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옛 연인이라던데."

"연인이라기보다는, 동업자였지."

"그 동업자가 당신의 왕국을 무너뜨리려 온다는 것이군."

"처음부터 내 왕국은 무너질 수 있는 구조였어." 고성욱은 편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만 누가 언제 무너뜨릴지를 정할 뿐."

라이라는 서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책장마다 꽂힌 책들, 벽면에 걸린 지도와 그림들까지 훑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 이야기를?"

"네가 에스텔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네가 이전에 머물던 곳이 에스텔 세력권이었잖아."

라이라의 손끝이 다시 스쳤다. 근데 이번에는 드레스 자락이 아니라 손목 안쪽이었다.

"오래전 일인데."

"그래도 네트워크는 남아 있잖아."

라이라가 돌아서서 벽장식품인 칼을 만졌다. 오래된 검으로 녹슬어 있었다.

"나는 당신의 정부일 뿐이야." 라이라가 말했다. "첩보원도, 부하도 아니야."

"알아."

고성욱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네가 만난 모든 악녀들은 나에게 정보를 주기 마련이었어."

라이라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그건..."

"네가 네트워크를 통해 에스텔과 연락한 지 얼마나 됐지?"

라이라는 칼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고성욱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나를 의심하는 거야?"

"의심이라기보다 확인이지."

그는 라이라에게 다가섰다. 몇 걸음 남지 않은 거리에서 멈추었다.

"편지에 독이 묻어 있었어."

라이라의 눈빛이 스치는 순간 흔들렸다.

"독? 에스텔에게서 온 편지에?"

"응미량으로 심장을 마비시키는 독이야."

라이라는 입술을 만졌다.

"당신은 살아있잖아."

"운 좋게 눈치챘지 만약 내가 제대로 읽기 전에 손끝으로 계속 문질렀다면 일주일 안에 죽었겠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성욱은 라이라의 앞에 섰다.

"네가 그녀와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냈어."

라이라는 고개를 숙였다.

"...확신하나?"

"확신할 수 있어서 말하는 거야."

고성욱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네가 나를 도우려 하지 않는다면 그건 괜찮아 하지만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한다면 나는 받아들이지 않아."

라이라는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당신에게 뭘 숨기겠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억울함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고성욱은 짧게 웃었다.

"모든 악녀들은 완벽한 거짓말쟁이야 네 얼굴에서 진실을 읽어내는 건 쉽지 않았어 하지만 손끝 떨림만은 읽어냈지"

그리고 그는 빠르게 움직였다.

라이라의 몸이 침대 방향으로 밀렸다.

그녀의 등받침이 매트리스에 닿고 고성욱은 그 위로 올라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라이라의 숨소리가 거칠어졌지만 눈빛은 두려움보다 분노를 담고 있었다 고성욱이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눌렀고 다른 손으로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았다 단검이 라이라의 목 옆으로 스치면서 피부에 닿았다

긴장감과 관능이 뒤섞인 공기가 방 안에 흘렀다 라이라의 드레스 아래로 드러난 쇄골과 가슴선 위로 칼날 끝이 멈춰 있었다 몇 초 동안 두 사람 모두 숨죽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녀를 돕는 이유." 고성욱의 목소리가 낮았다 "내 아이를 가졌기 때문인가."

라이라가 눈을 굴렸다 그것은 부정이나 긍정보다 저항하는 몸짓에 가까웠다

"...아니면 그녀가 네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인가"

라이라의 입술이 떨렸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침묵 유지 그것 또한 하나의 대답이다

고성욱은 칼날을 거뒀다 푸른 빛의 단검이 천천히 목에서 떨어져 허리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일어나 침대 옆 탁자의 초를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벽장 쪽으로 걸어가 망토 하나를 집어 들었다 두꺼운 남색 천으로 안쪽에는 은실로 문양이 수놓여져 있는 망토였다 라이라가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뭘 하려는 거야"

고성욱이 망토를 어깨에 걸치며 돌아섰다

"좋아 그럼 그녀에게 전해라"

서재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는 말했다

"내가 직접 찾아가겠다고"

라이라의 눈동자가 커졌지만 고성욱은 돌아보지 않았다 문 밖 복도의 어둠 속으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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