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겨울과외

초인종을 누르자 가벼운 신호음이 울렸다. 소희는 가방 끈을 한번 더 바짝 조여 멨다. 첫 과외라서 그런지, 아니면 동네 자체가 낯설어서 그런지 손바닥에 땀이 좀 찼다.

강남 쪽이었다. 아파트 단지도 그냥 아파트가 아니라 주차장에 외제차가 즐비한 곳이었다. 소희가 사는 반지하 원룸과는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건물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겼고, 엘리베이터 문은 금속이 아니라 나무 무늬로 마감되어 있었다.

문이 열렸다. 중년의 여성이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소희를 훑어보는 시선에 잠시 머뭇거림이 스쳤다. 아마 예상했던 과외 선생님보다 젊어 보여서였을 거다.

"과외 선생님 되시죠? 어서 들어오세요."

소희는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현관으로 발을 들였다. 신발을 벗으며 거실을 스쳤다. 넓었다. 가구는 많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벽에 걸린 액자 속 그림마저도 값나가는 작품 같았다.

엄마는 소희를 안쪽 방으로 안내하면서 대충 인사만 건넸다.

"영민이가 좀 장난끼가 있긴 한데, 그래도 공부 열심히 시켜 주세요. 제가 집에 없을 때가 많아서 신경을 많이 못 써줬거든요."

소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엄마는 방문을 열어주고 잠시 안을 들여다보더니, 별말 없이 자리를 떴다. 그녀의 뒤꿈치 소리가 거실 쪽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마 외출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방 안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영민이었다. 소희보다는 한참 어리지만, 덩치는 또래보다 조금 큰 편이었다. 머리는 단정하지 않게 약간 헝클어져 있었고, 교복 대신 편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소희는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에 과외를 맡게 된 소희라고 해요"라고 말하며 교과서를 가방에서 꺼냈다. 책상 위에 수학 문제집을 펼치려는데, 문득 영민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의 눈은 소희의 얼굴이 아니라, 그 아래를 훑고 있었다. 분명하게, 망설임 없이.

소희는 무심한 척 교과서를 더 높이 들어 올렸다. 그가 아직 중학생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냥 호기심일 거다. 요즘 애들 다 그렇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영민아, 우선 수학부터 해 볼까? 네가 어느 부분을 어려워하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영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여전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희는 목이 약간 말랐지만 목소리에 담아내지 않으려 애썼다.

"자, 여기 1단원부터 한번 풀어볼래?"

소희가 문제집의 첫 페이지를 가리켰다. 영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제야 소희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빛에 약간 짓궂은 빛이 섞여 있었다.

"선생님 예쁘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소희는 손에 쥔 펜을 내려놓았다. "그런 소리 말고, 문제를 봐."

"진짜 예쁘시네. 우리 학교 선생님들 중에는 이런 분 없는데."

소희는 심호흡을 했다. 아이일 뿐이다. 그냥 십대 중학생의 철없는 말이다. 이걸 가지고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첫날부터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 집에 들어오면서 느꼈지만, 과외비도 짜지 않았다. 한 달에 네 번, 꽤 괜찮은 금액이었다.

"고맙지만, 우린 수학을 하러 모인 거니까. 자, 여기 이 문제 한번 풀어볼래?"

소희는 가능한 한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며 문제집을 다시 가리켰다. 영민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숙이고 문제를 읽기 시작했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나올 뻔했지만 소희는 참았다.

아직 한 시간 반이 더 남았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고, 소희는 생각했다. 그냥 과외일 뿐이다. 공부 가르치고, 돈 받고, 집에 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영민이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왠지 그 단순한 계산이 틀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민이 문제를 읽는 척하는 모습이 잠깐 지속됐다. 소희는 그가 집중하는 틈을 타서 교과서를 좀 더 자신 쪽으로 당겼다. 적어도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다면, 그곳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민이 갑자기 몸을 기울였다. 그의 손이 소희의 손 위로 올라왔다. 소희의 손등을 덮은 그의 손가락은 더럽지 않았고 오히려 깨끗했지만, 그 온도가 불쾌했다.

"여기 모르겠어요, 선생님."

소희는 손을 홱 빼냈다. 의자가 뒤로 밀리면서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일어서려고 몸을 돌렸다. 충분히 참았다고 생각했다. 첫날이고, 애일 뿐이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지만 이 선을 넘는 건 분명히 아니었다.

그런데 영민이 말을 던졌다.

"선생님 가슴 만지게 해주면 공부할게요."

소희의 손이 책상 위에 머물렀다.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에어컨 바람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렸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걸 들은 자신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모든 게 한꺼번에 밀려왔다.

중학생이 한 말이다. 이제 갓 사춘기 들어선 애가 건방진 장난을 친 것뿐이다. 그래도 소희는 화가 났다. 단순한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그의 눈빛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 눈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고, 단지 소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구경하는 중이었다.

소희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책상을 손바닥으로 세게 쳤다.

"그런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어."

목소리가 약간 떨렸지만, 최대한 단호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재빨리 가방을 챙겼다. 교과서와 문제집을 밀어 넣을 때 손이 약간 떨렸다. 지퍼를 잠그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선생님, 농담이었는데."

영민이 뒤에서 중얼거렸다. 소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이미 외출한 모양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와서,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멈춰 섰다.

문을 세게 닫았다. 쾅 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걸음은 빨라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발소리가 텅 빈 계단찍에 메아리쳤다.

밖으로 나오자 더운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소희는 걸음을 재촉했다. 원래 왔던 길을 되짚어 걸었지만, 주변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에 쥔 가방끈이 땀으로 미끄러웠다. 가로수 그늘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흐릿한 배경일 뿐이었다.

말도 안 된다. 중학생이 겨우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걸 과외 선생님한테 당당하게 말하다니.

소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났다. 그런데 화가 나는 것과는 다른 감정도 함께 올라왔다. 불안이었다. 이 과외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겨서 과외를 그만두면, 당장 다음 달 생활비부터 막막했다. 등록금도 아직 다 납부하지 못했다.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빨리 걸었는데, 집에 가까워질수록 속도가 줄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낡은 건물 사이로 햇빛이 간신히 스며들었다. 소희가 사는 반지하 원룸은 그 골목 끝에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방 안은 후덥지근했다. 선풍기를 켜지 않은 채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의자에 앉았다. 가만히 앉아서 천장을 바라봤다. 아까 일이 자꾸만 되풀이됐다. 영민의 손이 자신의 손 위에 얹어졌던 감촉, 그의 말투, 그 눈빛.

소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하는지 아직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과외를 포기하면 당장 돈이 필요했다. 다른 과외를 구할 때까지 버틸 여유가 없었다. 통장 잔고는 얼마 남지 않았고, 다음 달 등록금 고지서는 책상 서랍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방문을 닫았다. 소희는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섰다. 등록금 고지서가 눈에 띄었다. 흰 용지 위에 찍힌 숫자가 방 안의 다른 모든 것을 압도했다. 350만 원. 다음 주까지 납부해야 하는 금액이었다. 이미 한 차례 연기한 상태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통장을 꺼냈다. 잔고는 47만 3천 원. 이번 달 생활비를 빼면 사실상 20만 원 정도가 남았다. 등록금은커녕 다음 달 월세도 걱정이었다. 아르바이트는 두 군데에서 하고 있었지만, 등록금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과외비가 들어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희는 고지서를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에 금이 가 있었다. 비가 오면 간혹 물이 샜지만, 관리인에게 말해도 고쳐주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살았다. 참고 버티는 게 익숙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익숙함조차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밤이 깊어갔다. 선풍기 바람만이 방 안을 맴돌았다. 소희는 뒤척였다. 영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손이 자신의 손 위에 얹혔던 감촉. 그리고 그의 요구. "선생님 가슴 만지게 해주면 공부할게요."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화가 났다. 당연히 화가 났다. 그런데 그 화는 금방 다른 감정으로 대체되었다. 불안이었다. 그 과외를 놓치면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할까. 다른 과외를 구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학기 초에 과외 자리를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경쟁도 치열했고, 소희처럼 경력이 없는 대학생을 선호하는 집은 많지 않았다.

소희는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었다. 오래된 김치 한 조각과 반찬통 두 개가 있을 뿐이었다. 문을 닫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침이 왔다. 잠을 거의 자지 못해서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머리는 이상하게 맑았다. 밤새 내린 결론이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소희는 핸드폰을 들어 영민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과외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저 소희예요. 어제 일찍 나와서 죄송했어요. 영민이가 좀 피곤해 보여서 일찍 끝냈거든요."

영민 엄마는 잠시 침묵했다. "아, 네. 괜찮아요. 그럼 오늘은 어떻게 할까요?"

"다시 과외를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영민이도 선생님을 괜찮아하던데요. 오늘 오후에 또 오실 수 있나요?"

"네, 그렇게 할게요."

전화를 끊었다. 소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참 동안 벽을 바라봤다.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자각하고 있었다. 그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적어도 당장은.

오후가 되자 다시 영민의 집 앞에 섰다. 같은 아파트, 같은 현관문이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이번에는 영민이 직접 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교활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미소는 말하고 있었다. 역시 돌아올 줄 알았다고.

"선생님, 들어오세요."

소희는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방문을 열어주었고, 그녀는 안으로 발을 들였다. 책상 위에는 교과서가 펼쳐져 있었다. 수학 문제집이었다. 영민이 의자에 앉으려는 듯 교과서 쪽으로 손을 뻗었다.

소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했다.

"네 조건을 받아들일게."

영민의 손이 교과서 위에서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희를 바라봤다. 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교과서를 덮었다. 책상 위에 놓인 교과서가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리고 침대를 가리켰다.

소희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침대는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불이 한쪽으로 구겨져 있었고, 베개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움직여야 했다.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그녀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영민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여전히 그 교활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방 안에는 선풍기 바람 소리와 두 사람의 호흡만이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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