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아침의 맹세
새벽녘부터 내리던 가랑비가 그쳤다. 창밖으로 젖은 대숲이 보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공은 제 방 책장 앞에 서서 손에 든 책을 바라봤다. 표지에는 글자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냥 검은 비단에 은실로 실꿰매진 무언가, 마치 뱀의 비늘 같은 무늬가 은은하게 빛났다. 『최면심공』. 삼일 전, 우연히 손에 들어온 이 비급은 저주나 다름없었다.
그는 책장 맨 윗칸을 열고, 평소에 아무도 손대지 않는 고서들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래도 찜찜했다. 다른 책들보다 조금 튀어나온 부분이 신경 쓰였다. 다시 꺼내서 더 안쪽으로 밀어 넣고, 앞에 놓인 불경 몇 권으로 가렸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아무도 여길 뒤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다. 무림에서 싸워온 수많은 날들보다 이틀이 더 길게 느껴졌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동안 그는 상대방의 검만 막으면 됐다. 지금은 달랐다. 자신의 손에 든 힘, 그걸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빠! 밥 먹어!"
아래층에서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방문을 열었다.
계단을 내려가 부엌으로 들어서자, 어머니가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여동생 소영은 이미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있었고, 어머니는 뜸이 잘 들었는지 밥통을 열어 김을 확인하고 있었다.
"앉아라."
어머니가 그를 보며 말했다. 평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주름진 손이 밥그릇을 들어 그의 자리 앞에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그가 인사하며 밥그릇을 받아들었다. 손끝에 따뜻함이 전해졌다. 갓 지은 밥이라 그런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머니가 자기 자리에 앉기 전에 국부터 그 앞에 갖다 놓았다. 평소처럼 늘 그러는 것처럼. 그가 좋아하는 미역국이었다.
"어제 늦게 들어오더라. 무림 일 때문에 바빴냐?"
어머니가 물었다. 식탁 아래에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조심스럽게 묻는 방식이었다. 그가 무림 일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걱정이 앞서니까.
"네, 별일 없었습니다."
그는 짧게 답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소영이 김치 한 조각을 집어 밥 위에 얹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 풍경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오후에 수련이 끝나고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 좀 늦을지도 몰라."
"어디로 가는데? 누구랑?"
그녀가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 "오빠, 나 이제 열여덟이야. 학교 친구들이랑 다과방에 갈 거야.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그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았다. 세상이 평화롭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너무 감싸는 것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테고.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 소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죽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에 책과 필기구를 넣고, 허리춤에 찰 단검 하나도 챙겼다. 무림 세상에서 여자가 혼자 다니려면 기본적인 호신술은 익혀야 했기에, 그도 가끔 검술을 가르쳐주곤 했다.
"오빠, 나 다녀올게!"
그녀가 현관으로 걸어가며 뒤돌아 웃어 보였다. 환한 미소였다. 얼굴에 그늘이라고는 없는, 아직 순수함을 간직한 얼굴.
그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보다 키가 한 뼘쯤 더 컸다.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손바닥에 닿았다.
"조심히 다녀와라. 너무 늦지 말고."
소영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알았어, 오빠. 걱정 마."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대문 쪽으로 멀어졌다.
그는 현관에 서서 한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돌아서서 책장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멈춰 섰다. 아니, 가면 안 됐다. 그 책을 다시 꺼내면 또 같은 생각만 반복될 게 뻔했다.
절대 쓰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제 손으로 제 가족을 해칠 수는 없었다. 그 비급은 불태워버려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아직 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약에, 정말로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그 힘만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면? 그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그는 대청마루에 앉아 오후 내내 검을 닦았다.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무쇠로 만든 검날이 햇빛에 반짝였다. 한겨울의 얼음처럼 차갑고 반들반들했다.
저녁이 찾아왔다.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고, 집 안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소영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대문 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무가 으스러지는 듯한 굉음이 집 안까지 울려 퍼졌다.
그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집어 들고 현관 쪽으로 뛰어갔다.
대문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네 개의 그림자가 부서진 문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앞장선 남자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한 손에 쇠사슬을 휘감고 있었는데, 그 끝에 날카로운 낫처럼 생긴 칼날이 달려 있었다.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면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네놈이 진가의 가주냐?"
남자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울렸다. 뒤에 따른 부하 셋도 각자 무기를 들고 있었다. 하나는 장검, 하나는 단도, 나머지 하나는 쇠몽둥이.
주인공이 검을 반쯤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누구십니까? 무슨 일로?"
"네놈이 최근에 손에 넣은 비급이 있다며. 그걸 내놔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았지? 이걸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 소문은 이미 퍼져나간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비급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쇠사슬을 든 남자가 비웃었다. "모르겠다고? 그럼 내가 알려주마."
그 순간, 부엌 쪽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어머니였다. 주인공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악당이 빠르게 움직였다.
"소영아!"
악당이 부하 중 하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부하가 대문 밖으로 나갔다가, 누군가를 잡아끌며 들어왔다. 소영이었다. 그녀의 가방이 바닥에 떨어져 내용물이 흩어졌다.
"오빠!"
소영이 악당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왔다. 남자가 그녀의 긴 머리를 움켜쥐고 힘껏 잡아당겼다. 그녀가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놓아라!"
주인공이 검을 완전히 뽑아들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언제라도 소영의 목이 꺾일 수 있었다.
악당이 소영을 자신의 앞에 세우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네놈의 비급을 내놓아라. 그럼 이 계집애를 살려주마."
그가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검을 휘둘러 그를 베는 게 가능할까. 하지만 소영이 그 사이에 있었다. 잘못하면 그녀가 다칠 게 뻔했다.
"비급 같은 건 없소. 나는 무술만 익혔을 뿐이오."
악당의 눈빛이 더 차가워졌다. "거짓말은 그만두는 게 좋아. 내가 정황을 모르고 온 줄 알아?"
악당이 소영을 뒤로 밀쳐냈다. 그녀가 바닥에 넘어졌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부엌 쪽을 바라봤다.
"어머니."
주인공의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악당이 걸어갔다. 쇠사슬이 바닥을 끌며 짤랑거렸다. 부엌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가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악당이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밖으로 꺼냈다.
"제발, 제발 제 아들을..."
악당이 어머니의 말을 끊었다. 손에 쥔 단검이 그녀의 목 앞에 겨누어졌다. 칼날이 목젖 바로 옆에 닿았다. 어머니가 숨을 삼켰다. 작게 떨리는 소리가 났다.
"네놈의 비급. 내놓을 생각이 생겼느냐?"
주인공이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어머니의 눈이 그를 바라봤다. 두려움과 함께, 무언가 간절한 것이 섞여 있었다. 제발 이렇게 하지 말라는 듯이. 아니면 자신은 괜찮으니 냅두라는 듯이.
"세고 셀 테니 결정해라. 하나..."
악당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주인공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검을 뽑아 던질 수도 있지만, 그가 어머니의 목을 그어버리기 전에 닿을 수 있을까.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또는 그보다 낮았다.
"둘..."
주먹이 더 세게 쥐어졌다. 무언가 잘못되면, 그건 그의 잘못이 될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그 비급을 얻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사실이 가슴을 찔렀다.
"셋!"
악당이 칼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주인공이 주먹을 풀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펴졌다. 손바닥이 앞을 향했다. 그 순간, 손끝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안개처럼, 혹은 불꽃처럼. 차갑고도 뜨거운 무언가가 그의 팔을 타고 흘러 손끝으로 모여들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방 안의 촛불이 흔들렸다.
악당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마치 안개가 낀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공허해졌고, 손에 쥔 칼이 미세하게 떨렸다. 주인공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그를 밀어붙였다.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손가락을 들어 악당을 가리켰다.
"네 칼로 네 심장을 찔러라."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 절대적인 힘이.
악당의 손이 움직였다. 칼이 천천히 돌아갔다. 자신의 목에서 떨어져 가슴 한가운데로 향했다. 그는 저항하려는 듯 손을 떨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 푸른 기운이 그를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칼끝이 옷깃을 뚫고 들어갔다. 살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얇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악당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칼이 더 깊숙이 박혔다. 악당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칼자루만 가슴 밖으로 나와 있었다. 피가 바닥에 번져나갔다.
침묵이 흘렀다.
부하 셋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뒤로 주춤거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대문이 부서진 틈으로 그들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주인공은 숨을 헐떡였다. 손끝의 푸른 기운이 서서히 사라졌다. 무릎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버텼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었다.
"어머니! 소영아!"
그가 달려갔다. 먼저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가 어머니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려 했다. 어머니의 몸이 축 처져 있었고, 그녀는 여전히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머니? 다친 데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아니, 그냥 꺾인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스스로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이 숙여졌다. 마치 신에게 절하듯, 혹은 주인에게 경배하듯. 머리카락이 바닥에 흩어져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어머니?"
그가 당황하며 그녀의 양팔을 붙잡았다. "일어나세요,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몸은 무거웠다. 아니, 그녀가 스스로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붙잡아 올리면 올릴수록, 그녀는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제발!"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머니가 반쯤 일어섰다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마룻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둔하게 울렸다. 그녀가 떨고 있었다.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그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습니다. 이제 다 지나갔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어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주인공의 손이 멈췄다.
어머니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평소에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지금은 달랐다. 경외심이 섞여 있었다. 두려움.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주인님..."
소리는 작았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 말은 분명히 그의 귀에 닿았다.
주인님.
그의 손이 어머니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 아니... 어머니. 제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머니는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만 간신히 들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소영이 뒤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주인공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의 손길을 피했다. 더 깊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챕터 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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