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황금빛 햇살이 낡은 목조 건물들 위로 쏟아져 내리고, 먼지 날리는 길 위로는 마차 바퀴 자국이 선명하다. 이따금 울리는 말의 히힝거림이 나른한 평화를 노래하듯 이곳은 거친 서부에서도 시간의 흐름이 한 박자 느리게 가는,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로 보인다. ​ 그 평화의 중심에는 마을 유일의 주점, '위그드라실'이 자리하고 있다. 크으~! 바로 이 맛이지! 안 그래, 털뭉아? 리오가 거품 가득한 맥주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은 벌써부터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맞은편에 앉은 털뭉 역시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그럼!! 세상 모든 시름이 씻겨나가는 맛이라고... 딸꾹! 그나저나 술도 잘 못먹는 녀석이 오늘은 무슨 댓바람이 불어서 병나발을 부냐? 주점 카운터 안쪽에서 깨끗한 잔을 마른 천으로 닦고 있던 마데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유리잔 위를 우아하게 스쳤다. 너희들, 벌써부터 그렇게 마시다간 내 쌍둥이 동생이 도착하기도 전에 바닥에 뻗어 있는다? 카라가 그 꼴을 보면 누구에게 당했냐고 할껄? 마데의 말에 리오가 벌떡 일어나며 가슴을 쳤다. 무슨 소리! 카라 누님이 오시는데, 당연히 최고의 환영회를 준비해야지! 이건 그냥... 목 축이는 거라고! 안 그래? ​ 흠냥.. 커어어어!!!!! 리오가 동의를 구하듯 털뭉을 툭 쳤지만, 털뭉은 이미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희미한 코골이를 시작한 후였다. ​ 그때, ​ 주점의 삐걱거리는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거대한 그림자에 왁자지껄하던 소음이 한층 더 상기됐다.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이는 장신에, 마을의 평화를 능히 책임질 법한 다부진 어깨, 그 익숙한 실루엣의 주인은 바로 마을의 보안관, 류지였다. 그 왈가닥 아가씨, 여전히 짤막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꼭 온다는 소식을 출정 보고처럼 보내왔어. 그는 마데 앞에 앉고서는 자신에게도 날아온 전보를꺼내 그것을 카운터 위에 펼쳐놓았다. 말에는 퉁명스러움이 묻어났지만, 그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상기된 뺨은 그가 얼마나 이 소식을 기다려왔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돌아온다니 다행이야. 편지 한 통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마데가 닦던 잔을 내려놓고 창밖의 평화로운 마을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안도와 깊은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이제 누나만 오면 완벽해!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도 잔뜩 하고, 밤새 춤도 춰야지! 누나가 춤추는 거, 진짜 멋있잖아! 에고... 으악..!!! 리오가 허공에 총 쏘는 시늉을 하며 당장이라도 테이블 위로 뛰어 오를 제스처를 취했고, 이내 취기에 몸을 못 가누며 발라당 넘어졋다. ​ 류지는 그런 리오를 보며 껄껄 웃다가, 마데에게 위스키 한 잔을 주문했다. 잔잔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주점 안의 먼지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 오랜 친구이자, 가족의 귀환을 앞둔 하루는, 그렇게 더없이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 ​ <1장 : 영웅의 귀환> 삐이이이------- ​ 날카로운 쇳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고 육중한 강철 바퀴가 마찰하며 일으키는 소음과 함께, 거대한 증기기관차가 짙은 수증기를 내뿜으며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 덜컹. ​ 기차가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완전히 멈추자, 굳게 닫혀 있던 객차의 문이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다. 이윽고 늘씬한 실루엣 하나가 매케한 연기를 가로지르며 걸어 나왔다. ​ 오랜 여정의 흔적인 흙먼지가 덮인 가죽 부츠가 플랫폼을 단단히 딛고, 뒤이어 허리 양쪽에 당당하게 매달린 권총집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람이 그녀의 푸른 머리칼을 가볍게 흩날리며 비정상적으로 하얀 피부를 스치고 마침내 고개를 든 그녀, 카라의 예리한 눈동자가 유난히 빛났다. ​ 그리고 그 시선은,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플랫폼 한쪽 끝에 우뚝 서 있는 류지를 정확히 찾아낸다. 카라. 오랜만이군. 무사히 돌아왔나? 그녀는 씩 웃으며 그를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또각, 또각. 그녀의 부츠 굽 소리가 플랫폼에 경쾌하게 울렸다. ​ 류지는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카라는 그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턱을 까딱이며 그의 가슴에 달린 별 모양 배지를 훑어보았다. 꼴에 보안관 배지는 달고 있네, 류지. 꽤나 어울리는데? 빈정거리는 듯하면서도 축하의 의미가 담긴, 그녀다운 인사. 그 말에 류지는 피식 웃으며 팔짱을 풀었다. ​ 너야말로. 전설적인 총잡이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셨군. 온 동네가 네 총질 소문에 시끄럽던데. ​ 소문은 무슨. 그냥 돈 되는 일 좀 하고 온 것뿐이야. 그보다 류지야말로, 이 먼지 풀풀 날리는 동네에서 보안관 노릇 하려면 꽤나 고생이겠는데? 그녀의 시선이 류지의 어깨 너머,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마을의 풍경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여전했지만, 보안관이 된 류지의 존재는 새로운 변화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 류지는 카라의 짓궂은 말에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돈 되는 일'이라는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총성과 위험이 담겨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가 먼저 몸을 돌려 역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카라의 위로 드리워졌다. 말 나온 김에 잘 됐군. 마침 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거든. 마데 녀석도 널 기다리고 있어. 일단 주점으로 가서 이야기하지. ​ 그 오빠가? 총소리만 나도 기겁하는 사람이 날 기다린다고? 별일이네. 카라는 콧방귀를 뀌면서도 순순히 류지의 뒤를 따랐다. 오랜만에 맡는 고향의 냄새, 삐걱거리는 나무판자 길의 감촉, 그리고 든든한 동료의 등이 주는 안정감이 나쁘지 않았다. ​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멀찍이서 전설적인 총잡이의 귀환과 새로운 보안관의 모습을 흥미롭게, 혹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 ​ ​ <2장 : 귀향> 딸랑--- ​ 낡은 나무 문에 달린 종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등장을 알렸다. 매캐한 바깥 공기와는 전혀 다른, 오래된 오크통에서 풍기는 짙은 술 향기와 고소한 음식 냄새가 카라의 코를 간질였다. 카라! 누나!!! 진짜 돌아왔구나! 카운터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리오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의자가 뒤로 넘어갈 듯 벌떡 일어난다. 빨갛게 취기가 오른 얼굴, 생기 넘치는 푸른 눈동자가 강아지처럼 반짝였다. ​ 털뭉은 거나하게 취했는지,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미동도 없이 뻗어 있고 간간이 만족스러운 숨소리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어서 오렴, 카라. 무사해서 다행이야 반질반질하게 관리된 카운터 안쪽에서 마데가 고고한 자태로 와인 잔을 닦던 손을 멈추며, 부드러운 미소로 동생을 맞았다. ​ 리오가 성큼성큼 다가와 카라의 어깨를 툭 치며, 가장 가까운 의자에 앉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와, 누나! 이번엔 또 어디서 뭘 부수고 온 거야? 소문 들었어! 무슨 열차를 통째로!!!!! ​ 시끄러워, 리오. 넌 술도 못하는 애가 대낮부터 무슨일이래? 카라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면서도 입가에 걸린 미소를 감추지는 못했다. 그녀는 쿵, 소리가 나게 마데의 앞에 앉더니 뻗어버린 털뭉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마데 오빠, 저 주정뱅이한테 외상값은 제대로 받고 있는 거지? 카라의 말에 마데는 우아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사랑과 유머가 있다면 외상쯤이야 인생의 작은 양념이지. 외상값 대신 털뭉이가, 예전에 너오면 좋아할거라구 비싼 술 하나를 구해왓던데. 한번 볼래? 그는 카운터 아래에서 먼지가 살짝 뽀얗게 앉은 술병 하나를 꺼내 보였다. 카라가 가장 좋아하는 독한 위스키였다. 평화롭고, 익숙하며, 더없이 그리웠던 풍경이었다. ​ 마데가 병마개를 ‘딱’ 하고 열자, 깊은 호박빛 향이 공기를 적셧고 리오와 류지 역시 각자의 잔을 들며 평화로운 주점의 공기가 그들을 감쌌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카라. ​ 전설의 귀환을 위하여! 건배! ​ 오래 살아야 할 텐데. 건배. 카라는 피식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마데의 부드러운 미소까지 더해져 네 개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히려던 바로 그 순간! ​ ***타앙!!!!***​ ​ 날카로운 파열음이 주점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며, 섬광과 함께 카라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잔이 산산조각 났다. ​ 찰나의 정적. ​ 리오의 잔은 허공에 멈춰 있었고, 류지의 미간은 흉흉하게 구겨졌다. 마데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고 창백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 카라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방금 전까지의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황야의 맹수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살기를 내뿜으며 본능적으로 총알이 날아온 방향, 주점의 가장 어두운 구석 테이블로 시선을 향했다. ​ 그곳에는 언제부터 앉아 있었는지 모를 한 사내가 있었다. 깊게 눌러쓴 후드와 복면 그림자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 그 형체는 마치 똬리를 튼 독사 같은 불길한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었다. ​ 남자의 손에 들린 권총의 총구에서는 아직 가시지 않은 희미한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 그는 카라와 눈이 마주치자, 그림자 속에서 눈고리를 비틀어 올리며 나직이 읊조렸다. 그 목소리는 모래가 섞인 바람처럼 거칠었다. 드디어 찾았다, 카라. 네년의 묫자리를 파주러 이 먼 곳까지 친히 행차했지. 주점 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고 공기는 순식간에 화약 냄새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 ​ ​ ​ ​ <3장 : 사냥감> 카라의 눈썹이 꿈틀했다. ​ 그녀는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조각과 흥건한 위스키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나 당황 대신,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냉소가 걸려 있었다. ​ 그녀는 마치 후드 쓴 사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유리조각과 위스키로 난잡한 손을 털어내더니 카운터 위에 놓인 새 유리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반대편 손으로 마데가 꺼내놓았던 위스키 병을 잡았다. 마데 오빠. 잔 하나 더 쓴다? 어디서 더러운 코딱지가 날아온거 같아서 말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류지와 리오가 당장이라도 총을 뽑아 들 기세로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카라는 그들의 긴장감마저 비웃는 듯했다. ​ 하지만 그녀가 위스키 병을 들어 올리던 바로 그 순간. 탕! 두 번째 총성이 주점의 공기를 찢었다. 이번 총알은 정확히 카라의 손에 들린 위스키 병의 몸통을 관통했다. 콰장창! 병이 공중에서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잘 숙성된 위스키가 갈색 안개처럼 흩뿌려졌고,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카라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 붉은 생채기를 남겼다. 으아악! 그의 평화로운 세계가 무참히 깨지며, 총소리에 기겁한 마데가 재빨리 카운터 아래로 몸을 숨겼다. ​ 그와 동시에, 테이블에 뻗어있던 털뭉이가 벌떡 일어나 부서진 술병을 향해 절규했다. 안 돼! 내 비싼 술이이이이! 그에게는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듯한 비명이었다. ​ 주점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카라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후드 쓴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뺨을 타고 붉은 피 한 방울이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 ​ 그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내린 채, 뱀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다음은 네년의 심장이다, 카라. 여기가 네년의 마지막 술집이 될 테니, 유언이라도 남기는 게 어때?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장난기나 탐색전의 기미가 없었다. 오직 카라를 죽이겠다는 순수한 살의만이 가득했다. 그의 진심이 담긴 경고에, 주점 안의 온도가 몇 도는 더 내려가는 듯했다. 쾅! 류지가 테이블을 짚고 있던 손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육중한 오크 테이블이 그의 힘에 비명을 질렀고, 날카로운 눈이 그를 향한다. 거기까지. 내 마을에서 허튼 수작 부릴 생각 마라. 총 버리고 순순히 따라와. 살인미수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 그의 목소리는 법 그 자체처럼 단호하고 위압적이었다. 경험 많은 총잡이의 노련함이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주점 안의 손님들은 숨을 죽였다. 보안관의 별이 그의 가슴에서 차갑게 빛났고, 카라는 류지에게 눈동자를 돌렷다가 이내 사내를 향한다. 재밌잖아. 내버려 둬, 류지. 결투 신청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주지. 저렇게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녀석은 오랜만이거든. ​ 결투? 웃기는 소리. 이건 사냥이다. 그는 류지의 경고도, 카라의 도발도 완전히 무시했다. 오직 목표물인 카라를 향해 다시 한번 권총을 들어 올리고서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방아쇠 위에 놓고 당기기 시작한다. ​ 모든 것이 찰나에 벌어질 일촉즉발의 상황. 타아앙! 주점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총성이 터져 나왔다. ​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그의 손에 들려있던 권총이 쩍 소리를 내며 두 동강 나 하늘로 솟구치며 강력한 충격에 손이 뒤로 꺾였다. ​ 모두의 시선이 총성이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느새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길고 육중한 머스킷을 겨눈 리오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 친구를 지키려는 자의 진중하고 뜨거운 열정이 그의 눈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우리 누나한테 손대지 마, 이 쓰레기 자식아! 리오의 외침이 주점 안에 울려 퍼졌다. 그는 카라의 앞을 막아서며, 얼빠진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 바닥에 나뒹구는 권총의 실린더 부분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리오를, 그리고 그 뒤에 선 카라를 차례로 훑었다. 그의 후드 그림자 아래, 분노와 굴욕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언뜻 비쳤다. 방해하지 마라, 애송이 새끼야!!!!!! 그의 목소리는 포효하는 맹수와 같았다. ​ 망가진 총의 손잡이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허리춤에 찬 또 다른 권총을 뽑아들며 리오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사냥감이 눈앞에서 발버둥 치는 것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그의 온몸에서 살기가 폭발했다. ​ 하지만 그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 카라가 리오의 어깨를 가볍게 밀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이전의 냉소적인 미소가 사라지고, 오직 전투를 앞둔 총잡이의 서늘한 집중력만이 남아 있었다. 리오, 잘했어. 이제부턴 내 사냥 시간이야. ​ ​ ​ ​ ​ <4장 : 결투> 이봐, 이름도 모를 사냥꾼 양반. 나도 마구자비로 쏴버리는거 좋아하지만 그랫다가는 저기 멀대같이 큰 녀석이 나를 잡아먹으려 들거란 말이지? 우리의 방식대로, 정정당당하게 끝내는거 어떄? 그는 이성을 되찾으며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카라의 도발에 넘어갔다. ​ 여러 명과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보다, 일대일 결투에서 그녀를 꺾는 것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좋다. 네년의 그 오만한 혀를 뽑아버릴 마지막 기회군. 출처 : 무료 이미지 사이트 Pixbay 둘은 주점 밖으로 향했고 ​ 마주 보고 섰다. ​ 거칠고 마른 바닥 위에서 마치 운명의 시계를 대신하듯 회전초 하나가 바닥을 따라 굴러갔다. ​ 둘 사이의 거리는 약 열 걸음. ​ 언제 총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을, 서부의 총잡이들에게는 생과 사를 가르는 절대적인 거리였다. ​ ​ ​ ​ ​ 카라는 두자루의 권총 손잡이를 가볍게 쥐었다. ​ ​ ​ ​ ​ 사내는 새로 뽑아 든 권총을 고쳐 잡았다. ​ ​ ​ ​ ​ 사내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 ​ ​ ​ ​ 카라의 시선이 그 손끝을 따라 미끄러지고, 공기 속의 긴장감이 한층 더 조여든다. ​ ​ ​ ​ ​ 이윽고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 털뭉이의 훌쩍임도, 겁먹은 손님들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오직 두 사람의 심장 박동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의 긴장감만이 공간을 채웠다. ​ 마을 바깥에서부터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바람에 낡은 주점의 문이 ​ 삐걱 ​ 소리를 냈다. ​ 그것이 신호였다. ​ 탕! 타앙! ​ ***탕!***​ ​ 세 발의 총성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하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카라의 쌍권총이 불을 뿜는 속도가 그의 총보다 찰나의 순간만큼 더 빨랐다. 그녀의 몸은 마치 춤을 추듯 유연하게 회전하며 총알을 발사했다. ​ 그가 쏜 총알 한 발은 카라의 옆구리를 스치며 그녀의 셔츠를 찢고 지나갔다.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 하지만 카라가 쏜 두 발의 총알은 정확했다. ​ 한 발은 그의 어깨를 꿰뚫었고, 다른 한 발은 그의 손에 들린 권총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날려버렸다. ​ 크학...!!!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어깨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고 발치에는 두 번째로 잃어버린 권총이 힘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 승부는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 카라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쌍권총의 총구를 천천히 내리며, 피를 흘리는 그를 바라보고 본인의 스태슨 햇을 벗어 가볍게 털어내었다. 사냥? 결투? 넌 아직 멀었어, 애송아. 내 고향까지 찾아온 정성을 봐서 목숨만은 붙여주지.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마라. 그때는 네놈의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내줄 테니까. 카라의 싸늘한 선언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그림자가 쓰러진 사내를 덮쳤다. 어느새 다가온 류지가 저항하려는 그의 성한 쪽 팔을 등 뒤로 꺾어 제압했다. 어깨에 총상을 입은 그는 고통에 찬 신음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무력하게 붙잡혔고 류지는 그를 질질 끌고 주점 기둥 쪽으로 향했다. 자, 쇼는 끝났다. 우리 잠시 대화 좀 할까? 마데에게는, 미안하게 됐군. 수리비랑 술값은 나중에 정산해야겠지.. 털뭉이 녀석 외상값 독촉하면 얼추 부서진 곳은 떼우고도 남을거야. 이럴때만 귀가 밝은지 주점 내부에서, 꺠진 술병을 부여잡고 훌쩍이던 털뭉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 리오가 머스킷을 쥐었다 땟다 하던 손을 풀고는 수심가득한 얼굴로 카라에게 달려왔다. ​ 카라 누나! 괜찮아? 옆구리 한번 봐봐!! 그는 카라의 셔츠를 찢고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카라는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씨익 웃었다. 살짝 긁혓을 뿐이야. 네 덕에 살았네, 우리 막내! 아이고 기특하다!! 그녀는 리오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칭찬했다. ​ 잠시 후, 류지가 소리쳤다. 카라! 이놈, 네놈을 아는 것 같은데. 와서 얼굴이라도 확인해보지 그래? 카라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리오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눈짓을 보내고는, 천천히 주점 기둥에 쳐박힌 그에게 다가간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황야의 바람이 흙먼지를 실어와 그녀의 뺨을 스쳤다. ​ 류지는 그를 기둥에 단단히 묶어놓고는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와 복면을 거칠게 벗겨냈다. ​ 드러난 얼굴은 원한과 광기로 뒤틀려 있었다. 누구냐, 넌. 날 어떻게 아는 거지? 카라의 나직한 물음에, 그는 마른 기침을 토해내며 미치광이처럼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 내가 끝이 아니다, 이 마녀 같은 년! 곧 그들이 올 것이다! 코라! 코티! 코아노! 그들이 이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고, 네년에게 절망을 선사할것이야!! 그의 저주 섞인 외침에 류지의 미간이 좁혀졌다. 카라가 한 발 더 다가가 정보를 캐내려던 순간, 그는 섬뜩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어깨춤을 물더니 이빨로 뜯어내며 줄 같은거를 당겨냇다. ​ 찢어진 그의 어꺠춤부터 활짝열린 몸통에는 여러 개의 다이너마이트 뭉치가 질척하게 감겨 있었다. ​ 그리고---- ​ 치이익 ​ 거리는 소리와 함께 뇌관에 점화가 붙는 소리가 온 사방을 울린다. ​ 우리 모두, 지옥에서 만나자!!!!!!!!!! 류지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젠장, 피해!!!!!!!!!!! 류지는 외침과 동시에 몸을 날려 카라를 덮쳤다. ​ 리오 역시 본능적으로 주점 안으로 몸을 던지며, 상황을 보러 나오는 마데를 다시 주점 안으로 밀어넣는다. ​ 콰아아아아아아앙!!!!!!!!!!!!!!!!!!!!!!!!!!!! ​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주점의 입구를 중심으로 거대한 화염과 충격파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나무 파편과 흙먼지가 폭풍처럼 사방으로 터져 나갔고, 주점의 낡은 간판이 박살 나며 땅으로 처박혔다. ​ 카라를 감싸 안고 바닥을 구른 류지의 등 위로 뜨거운 파편들이 쏟아졌다. 겨우 몸을 피한 그들의 귓가에는 이명이 윙윙거렸고,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 폭발이 멎고, 자욱한 연기가 서서히 걷히자 처참한 광경이 드러났다. 그가 묶여 있던 기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검게 그을린 구덩이만이 뻥 뚫려 있었다. 주점의 입구는 반파되었으며, 주변은 온통 파괴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 류지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등은 크고 작은 파편에 긁혀 피투성이였다. ...젠장할. 미친놈이었군. 카라는 류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폭발의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분노와 불길한 예감으로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 한 명의 미치광이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남긴 경고. 코라, 코티, 코아노... 그 이름들이 불길한 낙인처럼 그녀의 뇌리에 새겨졌다. 평화롭던 고향 마을에, 피비린내 나는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 ​ ​ ​ ​ <에필로그> 탁. 탁. 탁. 한입 베어문 케이크 마냥 뻥 뚫린 주점의 입구를 마데가 망치질 하고 있다. ​ 안쪽에서 털뭉은 비틀거리며 테이블에 엎어져 곤히 잠든 리오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의 손길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야… 리오. 일어나 봐. 한 잔만 더 하자니까. 하지만 리오는 미동도 없었다. 고른 숨소리만이 그의 평온한 수면 상태를 증명할 뿐이었다. 털뭉은 혀를 차며 자신의 텅 빈 주머니를 뒤적였다. 짤랑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먼지만 손끝에 묻어 나왔다. '5년치 외상값이 한꺼번에 나가버리다니.. 이건 죽으라는 건가'라며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감돌았다. ​ 잠시 고민하던 털뭉의 시선이 리오의 볼록한 조끼 주머니로 향했다. 그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마데는 폭발로 엉망이 된 주점 입구를 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류지와 카라는 보안관 사무실로 향한 뒤였다. ​ 완벽한 기회다. ​ 털뭉은 침을 꿀꺽 삼키고,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리오의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빳빳한 지폐 몇 장과 묵직한 동전 몇 개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돈을 낚아채 자신의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 그는 훔친 돈을 당당하게 카운터 위에 올려놓으며, 수리에 한창인 마데를 향해 외쳤다. ​ 주인장! 여기 위스키 한 잔! 리오가 사는 거요! 망치를 든 채 돌아본 마데가 신나게 팔을 팔딱이는 털뭉과 뻗어있는 리오를 번갈아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으이그 너희들의 우정은 참 대단하구나.... 마데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카운터로 돌아와 선반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 들었다. ​ 창밖으로는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곧 닥쳐올 피비린내 나는 폭풍을 알지 못한 채, 평화로운 술주정뱅이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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