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일상의 틈
방 안의 공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으나 진우의 몸에선 식지 않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문을 잠근 손끝이 여전히 가늘게 떨렸다. 조금 전 베란다 창가에서 달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서 있던 정희의 실루엣이 망막에 낙인처럼 찍혀 사라지지 않았다. 얇은 실크 잠옷 너머로 비치던 그 굴곡진 선은 장모라는 단어 뒤에 숨어 있던 여자의 육체를 비릿할 정도로 생생하게 드러냈다.
진우는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눕히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어둠 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자니 자기 자신이 한없이 비겁하고 추잡하게 느껴졌다. 아내를 잃은 지 고작 석 달이었다.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러 온 장모를 보며 그런 원초적인 충동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를 난도질하는 죄책감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눈을 감을수록 그녀의 하얀 목덜미와 매끄럽게 떨어지던 허벅지의 윤곽은 더욱 뚜렷하게 되살아나 그를 괴롭혔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진우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이른 아침이었다. 문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배고픔에 칭얼거리는 민준의 소리에 결국 문손잡이를 돌렸다. 거실로 나서자마자 마주한 풍경은 전날 밤의 그 기괴한 긴장감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평온했다.
정희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단정한 차림으로 주방에 서 있었다.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 깔끔하게 정리했고, 앞치마는 그녀의 몸을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그녀는 진우가 나오는 소리를 듣고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냄비를 젓는 데 집중했다.
"일어났나, 김 서방? 콩나물국 끓여놨으니 어서 씻고 나오게."
차분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어젯밤 사위의 뺨을 어루만지던 그 내밀한 손길이나, 달빛 아래 드러냈던 파격적인 차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진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하면서도 묘한 허탈감을 느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자신의 피로가 만들어낸 환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식탁에 마주 앉았을 때도 정희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녀는 민준의 입가에 묻은 밥알을 떼어주며 진우에게 반찬을 밀어주었다. 젓가락이 오가는 짧은 순간마다 진우는 그녀의 손가락 끝을 훔쳐보게 되었다. 어젯밤 자신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던 그 가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날 때마다 목구멍에 걸린 밥알이 모래알처럼 껄끄러웠다.
정희는 식사를 마친 뒤 거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아침 햇살이 거실 안쪽까지 깊숙이 밀고 들어오자 집안의 모든 사물이 선명하게 그 자태를 드러냈다. 그녀가 바닥을 닦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엎드렸을 때,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면바지 위로 엉덩이의 둥근 곡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진우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TV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걸레질을 하는 팔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엎드린 자세에서 드러나는 성숙한 육체의 무게감이 거실의 공기를 무겁게 눌렀다. 정희는 아무런 의도가 없는 듯 묵묵히 자신의 일에만 전념했기에, 오히려 그런 그녀를 훔쳐보는 진우의 욕망만이 더욱 기형적으로 비대해졌다.
오후가 되어 진우는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좋아하던 동네 공원을 걸었으나 머릿속은 온통 집안에 남겨진 정희의 잔상뿐이었다. 수진이 생전에 쓰던 향과 같은 냄새를 풍기던 그 수건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눈빛. 정희는 단순한 장모의 역할을 넘어, 이미 진우의 일상 깊숙한 곳에서 수진의 존재를 잠식해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정희는 베란다에 서서 건조대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이 그녀의 등 뒤를 비추어 옷감 너머로 그녀의 체형이 실루엣처럼 보였다. 진우는 현관에 멈춰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정희가 팔을 높이 들어 올릴 때마다 상의가 위로 말려 올라가며 허리춤의 하얀 살결이 잠깐씩 노출되었다.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진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정희는 뒤늦게 진우를 발견하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벌써 왔나? 날이 좋아서 빨래가 금방 마르겠어."
그녀는 다가와 진우의 겉옷을 받아들었다. 옷을 받아드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손가락이 가볍게 스쳤다. 진우는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에 움찔하며 손을 뗐지만, 정희는 아무런 동요 없이 옷을 옷걸이에 걸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비누 향이 코끝을 스쳤다. 전날 밤의 그 몽환적인 향기였다.
저녁 식사 후, 민준이 일찍 잠들자 거실에는 두 사람만의 정적이 찾아왔다. 진우는 서재로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소파에 앉아 책을 펴 들었다. 정희는 부엌 정리를 마치고 거실 한쪽에서 뜨개질을 시작했다.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바늘 소리만이 고요한 거실을 채웠다.
진우는 책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 위로 보이는 정희의 옆얼굴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돋보기를 코끝에 걸치고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은 지적이면서도 묘하게 도발적이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뜨개질 코를 세는 그녀의 표정에서 수진의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
정희가 자세를 고쳐 고개를 들었을 때, 진우는 급히 책으로 눈을 돌렸다. 심장 박동이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김 서방, 눈이 침침하면 불을 좀 더 밝게 켜지 그러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스위치로 향했다. 그녀가 지나갈 때 바람에 실려 온 온기가 진우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진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겼다. 손등에 맺힌 땀이 책장의 종이를 눅눅하게 적셨다. 정희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진우의 옆으로 와서 멈춰 섰다.
그녀의 그림자가 진우의 책 위를 덮었다. 진우는 숨을 멈춘 채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정희는 아무 말 없이 진우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뭉친 근육을 부드럽게 누르는 그녀의 손길은 지극히 기능적이었지만, 그 접촉 면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진우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어깨가 많이 뭉쳤네. 마음고생이 심해서 그런가."
정희의 목소리가 귓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진우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머리카락 끝을 살짝 건드렸다. 고의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는 그 섬세한 손길에 진우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잠시 후 정희는 손을 떼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뜨개질을 이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진우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진우를 유혹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를 돌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단정한 헌신이 오히려 진우를 더욱 깊은 집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녀의 사소한 움직임, 앞치마 아래로 스치는 치맛자락의 소리, 차를 마실 때 목을 타고 넘어가는 목울대의 움직임까지 진우는 관찰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이제 단순한 관찰을 넘어 갈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희도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간혹 진우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빛이 감돌았다.
밤이 깊어지자 정희는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홀로 남겨진 진우는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녀가 쓰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진우는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물을 마시려 컵을 들었지만 손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복도 끝 정희의 방 문틈으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진우는 그 문 앞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그 빛을 응시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옷가지의 마찰음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어제 보았던 그 실크 잠옷을 다시 입고 있을까, 아니면 더 깊은 속살을 드러낸 채 침대에 누워 있을까.
갈증은 물 한 잔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진우는 컵을 내려놓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욕실 쪽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정희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몸을 씻으려 욕실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실루엣이 뿌연 증기와 섞여 몽롱하게 일렁였다.
진우는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복도 한가운데 굳어버렸다. 유리문 너머로 정희의 굴곡진 몸매가 흐릿하게 그려졌다. 그녀가 팔을 들어 머리를 감는 듯한 동작을 취할 때마다 풍만한 가슴의 실루엣과 유려하게 휜 허리 라인이 강조되었다. 진우의 호흡은 다시 거칠어졌고, 손바닥에서는 아까보다 더 많은 땀이 배어 나왔다.
물소리가 멈추고 욕실 안이 고요해졌다. 곧이어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당황하여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싼 정희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실에서 방금 나온 탓인지, 온몸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정희는 복도에 서 있는 진우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젖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얇은 가운 속으로 스며드는 장면이 진우의 시선을 강제로 끌어당겼다.
"안 자고 있었나, 김 서방?"
정희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에게선 뜨거운 수증기와 함께 더욱 짙어진 비누 향이 풍겼다. 그녀의 하얀 발가락이 복도 바닥을 누비며 진우의 발치 근처까지 다다랐다. 진우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정희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 하나가 진우의 발등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진우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눈동자 속에는 슬픔인지 갈망인지 구분할 수 없는 깊은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진우는 그 소용돌이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정희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진우의 가슴팍에 머물렀다.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손바닥 온기에 진우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밤이 깊었네. 이제 그만 들어가 쉬게."
정희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가슴을 아주 부드럽게 밀어냈다. 거부라기보다는 오히려 은밀한 신호처럼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그녀는 진우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복도에는 그녀가 남긴 젖은 발자국과 자극적인 향기만이 맴돌았다. 진우는 그녀의 방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간신히 방으로 발을 뗐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커녕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어둠 속에서 정희의 목소리와 손길이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장모라는 이름의 단단한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진우는 이 위험한 이끌림이 어디로 향할지 알면서도, 멈출 의지도 명분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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