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고인 물에 던져진 돌

거실 바닥에는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수진의 장례를 치른 지 벌써 석 달이 지났지만, 집안의 시간은 그날 오후에 멈춘 듯했다. 말라붙은 양념 냄새와 먼지가 뒤섞인 공기는 숨을 들이켤 때마다 폐부를 텁텁하게 찔렀다. 소파에 파묻힌 진우는 초점 없는 눈으로 TV 화면의 노이즈를 응시하며, 방 안에서 들려오는 민준의 울음소리를 방치했다. 아이의 울음은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처럼 고막을 긁어댔으나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현관 쪽에서 들려온 초인종 소리는 정적을 깨뜨리는 침입자였다. 진우는 대답할 기운도 없어 고개를 늘어뜨렸지만, 벨 소리는 집요하게 이어졌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현관문 앞으로 다가가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장모 정희가 양손에 이삿짐 가방 두 개를 묵직하게 들고 서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달려든 것은 차가운 바깥바람이 아니라 그녀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비누 향이었다. 정희는 넋이 나간 사위의 몰골을 보고도 아무런 질책을 하지 않았다. 그저 좁은 신발장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며 거실로 발을 들였다. 가방을 소파 옆에 내려놓은 그녀는 외투를 벗을 새도 없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거실을 채우던 쓰레기들이 정희의 손길에 의해 신속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익숙한 동작으로 난장판이 된 테이블 위를 치우고 안방으로 들어가 민준을 가슴에 품었다.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의 소리가 거짓말처럼 잦아들더니 곧 고요한 숨소리로 변했다. 아이를 침대에 뉘어두고 나온 정희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진 냄비에서 구수한 김이 피어오르며 죽어있던 집안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정희는 식탁 위에 정갈하게 담긴 국 한 그릇과 갓 지은 밥을 내어놓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진우의 위장이 비릿한 소리를 냈지만, 그는 여전히 식탁 앞에 앉는 것이 어색했다. 정희는 수저를 건네며 맞은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김 서방, 일단 좀 들게나. 사람이 기운이 있어야 아이를 보지."

낮게 깔리는 정희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거역하기 힘든 무게감을 담고 있었다. 진우가 억지로 국물을 한 모금 삼키자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 장기를 일깨웠다. 정희는 그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곁에 두었던 가방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짐을 좀 챙겨왔네. 민준이도 그렇고, 자네 사는 꼴을 보니 도저히 발길이 안 떨어져서."

정희는 당분간 이곳에서 함께 지내겠다는 뜻을 짧게 통보했다. 상의가 아닌 결정이었고, 진우에게는 그것을 밀어낼 만한 명분이나 의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단정한 갈색 머리칼과 무릎 위에 올린 고운 손을 보며 긴장이 풀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내가 죽고 난 뒤 처음으로 집안에서 맡아보는 사람의 냄새였다.

주방 등 아래 비친 정희의 옆얼굴은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어딘가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사위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다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진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인 채 뜨거운 국물을 들이켰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장모의 정조 있는 태도 뒤로 묘한 긴장감이 거실 너머까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정희가 온 이후로 집안의 채도는 눈에 띄게 밝아졌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던 플라스틱 용기와 먼지 뭉치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유리창에는 매끄러운 광택이 돌았다. 수진이 살아있을 때나 보았던 그 정갈한 질서가 집안 곳곳에 다시 깃들었다. 어둠이 내린 서재에 스스로를 가두고 지냈던 진우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청소기 소리와 민준의 옹알이 소리에 밀려 서서히 문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주방에서는 경쾌한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 앞치마를 질끈 동여맨 채 식재료를 다듬는 정희의 뒷모습은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진우는 식탁 근처에 멈춰 서서 그 실루엣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꼿꼿하게 세운 등줄기와 가늘게 떨리는 어깨, 그리고 집중할 때 살짝 기울어지는 고개의 각도까지 죽은 수진의 모습과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정희의 굴곡진 허리 라인 아래로 퍼지는 앞치마 자락을 보고 있자니, 마치 아내가 부활해 저곳에 서 있는 것 같은 환각이 일었다.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다 멈칫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현실로 돌아오면 그곳에는 아내가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희가 몸을 돌려 미소 지을 때마다 수진의 이목구비가 그녀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유전적인 유사성이라는 논리적인 설명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기이하고도 강렬한 데자뷔였다.

빨래 바구니를 옮기던 중 진우는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걸음을 멈췄다. 갓 건조를 마친 수건더미에서 풍겨 나오는 것은 수진이 생전에 고집스럽게 사용하던 섬유유연제의 향기였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살결에 남는 은은한 꽃향기는 수진의 고유한 체취와 다름없었다. 정희도 그 향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딸이 남긴 흔적을 지우지 않으려는 배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우는 수건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폐부 깊숙이 박히는 향기는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었던 그리움을 사정없이 끄집어냈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정희의 등 뒤로 다가갈수록 그 향은 더욱 짙어졌다. 그녀의 목덜미와 옷깃에서 배어 나오는 향기가 수진의 환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진우는 정희의 뒤에 서서 그녀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며, 손을 뻗어 그 온기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그날 밤 진우는 민준을 재우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온종일 감정을 누르느라 소진된 정신은 얕은 잠 속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드러운 감촉이 다리 위로 덮이는 느낌에 의식이 흐릿하게 깨어났다. 정희가 다가와 무릎담요를 조심스럽게 펴서 그의 몸을 감싸주고 있었다.

정희는 담요를 매만진 뒤에도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녀는 소파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잠든 사위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진우는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은 납처럼 무거웠고 몽롱한 의식은 현실과 꿈의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곧이어 작고 부드러운 손길이 진우의 뺨에 닿았다. 면도하지 않아 거칠어진 살결 위를 정희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뺨을 타고 흐르는 손길은 가슴 한구석을 저미게 만들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손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조심스러웠고, 그렇다고 남남의 손길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밀도가 높았다. 진우는 차가운 현실보다 이 아득한 온기에 기대고 싶었다. 손가락 끝이 턱선을 지나 관자놀이 근처를 머무를 때, 그는 이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수진이 돌아온 것 같은 착각 속으로 더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살갗을 파고드는 정희의 온기는 지독한 안식인 동시에 감당하기 힘든 무게로 그를 짓눌렀다.

뺨을 타고 흐르는 정희의 손길은 매끄러우면서도 단단했다. 진우는 눈을 뜨는 대신 그 온기가 피부 조직 밑으로 스며드는 감각에 집중했다. 수진이 퇴근한 자신을 반기며 얼굴을 비비던 그 시절의 온도를 손가락 끝에서 찾아내려 애썼다. 분명 장모의 손이었으나, 눈을 감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상실이 할퀴고 간 자리에 닿는 타인의 온기는 독한 마약처럼 이성을 마비시켰고, 진우는 그 착각이 깨어질까 두려워 숨조차 고르게 쉬려 노력하며 그 탐욕스러운 안식을 만끽했다.

정희는 한참 동안이나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입술 언저리를 스치듯 지날 때 진우의 가슴속에서는 알 수 없는 갈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 손길이 멈추지 않기를, 이 기이한 위안이 밤새 이어지기를 바라는 비겁한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정희는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떼어냈고, 바닥에 끌리는 조용한 발소리와 함께 거실 저편으로 멀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입안이 타들어 가는 갈증에 눈을 뜬 진우는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거실은 어두웠지만 베란다 창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실내에 창백한 윤곽을 그려내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주방을 향하던 진우는 거실 창가에 서 있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곳에는 정희가 서 있었다. 그녀는 평소의 단정한 차림이 아닌, 얇은 실크 소재의 잠옷을 입은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단처럼 매끄러운 원단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고, 정희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녀의 몸 곡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밀착되었다. 6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탄력 있는 어깨선과 실크 아래로 고스란히 비치는 풍만한 허벅지의 윤곽이 진우의 망막을 자극했다.

달빛 아래 비친 정희의 육체는 성숙한 여인의 기품과 묘한 육덕짐이 공존하고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는 죽은 수진보다 훨씬 더 농익은 여성미가 느껴졌고, 그것은 진우가 지금껏 애써 외면해온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웠다. 얇은 가운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와 그아래로 길게 떨어지는 곡선의 흐름을 마주한 순간, 진우는 심장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강렬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정희가 살짝 몸을 틀자 잠옷 너머로 도드라진 가슴의 실루엣이 달빛에 선명하게 드러났고, 진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현기증이 일었다. 조금 전까지 그리워했던 수진의 환영은 온데간데없고, 눈앞에 실재하는 여인의 육체만이 그의 뇌를 지배했다. 그것은 경외심이나 슬픔과는 다른, 지독히도 육체적이고 파괴적인 충동이었다.

정희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리려 했다. 진우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죄책감과 당혹감이 뒤섞인 감정이 해일처럼 몰려오자 그는 물을 마시려던 생각조차 잊은 채 뒤로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도망치듯 복도를 가로질렀다.

방으로 뛰어 들어온 진우는 문을 닫고 곧바로 걸쇠를 잠갔다. 차가운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눈에 띄게 덜덜 떨렸다. 등 뒤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고동치며 귓가를 때렸고, 폐부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거실에서 풍겼던 그녀의 비누 향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정희의 그 굴곡진 뒷모습이 망막에 낙인처럼 찍혀 사라지지 않았다.

문밖은 고요했으나 진우의 내면에서는 이미 도덕적 둑이 무너져 내리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어둠뿐인 방 안에서 자신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장모라는 이름의 거룩한 가면 뒤에 숨겨진 그 도발적인 위안이 다시금 그를 유혹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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